[피카최의 생각유람] ⑤ 크리에이티브의 유혹

[피카최의 생각유람] ⑤ 크리에이티브의 유혹

  • 최창원
  • 승인 2019.03.18 08: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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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ISTRAL DISHWASHER 광고 캡처
MAGISTRAL DISHWASHER 광고 캡처

눈으로 둘러싸인 호숫가의 한 곳. 그가 그녀를 만든다. 눈은 단추, 코는 홍당무, 헤어는 금빛 부드러운 실타래. 예쁜 그녀가 완성되고, 한눈에 그녀에게 반한 그는 단박에 그녀와 데이트를 시작한다.

달빛이 은가루로 부서지는 호숫가를 거닐고, 바에서 밤늦도록 사랑을 속삭이고, 숲속 한 곳에선 부비부비 19금을 마다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가는 그들. 그가 출근하면, 그녀는 누가 봐도 홀릴 만큼 매혹적인 모습으로 배웅을 하고, 그는 퇴근길 보석가게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발견한다.

저녁. 식탁 위엔 촛불이 켜져 있고, 식사를 마치는 그들. 그녀가 비워진 접시들을 치우는 사이, 그는 기어이 사온 반지 케이스를 꺼내든다. 그리고 그녀가 설거지 하고 있을 주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게 웬 일? 뜨거운 물로 설거지 하던 그녀는 녹아 없어지고, 그는 들고 있던 반지 케이스를 떨어뜨리며 절규한다. 그도 그녀도 눈사람이었고, 주방이 보이는 집 전경 위로 ‘이젠 찬물로도 설거지할 수 있어요(Now you can wash up in cold water)’라는 자막과 함께 주방세제 제품이 보인다.

<MAGISTRAL DISHWASHER>라는 브랜드의 주방세제 영상광고의 내용이다. 처음에 이 광고를 몇 번이나 되돌려서 보며 느꼈던 부끄러움과 뭉클함의 동시상영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주방세제 광고라면 나도 이력이 나게 해왔는데, 왜 단 한 번도 그런 제품에 이런 감성의 아이디어를 접목시키지 못했을까 하는 부끄러움. 그리고 그런 효과와 성능 위주의 제품에 이런 사랑의 절절함을 접목시킬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가슴 한 구석을 녹여오는 뭉클한 감동 같은 것.

이 주방세제처럼 잊혀 지지 않는 광고 중엔 이런 것도 있다. 아파트를 보며 소녀가 감탄하듯 외친다. “엄마, 이거 우리 집 맞나?” 두 번이나 반복되던 그 뽀송뽀송한 카피는 내 귀를 단번에 붙잡으면서, 자랑질하기 바빴던 내 이전의 숱한 카피들을 속절없이 패대기쳐 버렸다.

오랫동안 광고 아이디어를 내고 카피를 써오지만, 나는 아직도 ‘크리에이티브’란 게 무언지 잘 모른다. 그 작자는 변신술이 능해서 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 너무 현란하고 눈물나게 신선해서 자주 길을 잃게 만든다. 어제는 머리를 한 방 맞은 것처럼 놀라웠던 크리에이티브가, 일주일쯤 후엔 물먹은 솜방망이처럼 후줄근해 보이니 말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오늘도 조여 오는 크리에이티브의 압박. 그래도 내가 그 압박을 마다하지 않고 그 길로 계속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건, 눈사람이 전해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세레나데와, 소녀의 뽀송뽀송한 외침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나도 저런 크리에이티브를 내고 저런 카피를 쓸 수 있다는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그 유혹이 영원히 유혹으로 끝난다 해도 말이다.


최창원 카피라이터, 겸임교수, 작가, https://www.facebook.com/ccw7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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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미러 2019-03-19 15:04:01
따뜻한 봄날. 감성넘치는 스토리텔링. 잘보고갑니다^^ 저도 이런광고는 만들어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