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보다 아름답던 그녀는 왜 서쪽으로 갔을까

봄 꽃보다 아름답던 그녀는 왜 서쪽으로 갔을까

  • 장성미 칼럼리스트
  • 승인 2019.03.26 08:4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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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 仇英(구영)의 《漢宮春曉圖》일부
明, 仇英(구영)의 《漢宮春曉圖》일부

몽골에 봄 눈이 녹아 내리면 생명수가 되어 겨우내 가물던 황막한 대지에 기운을 북돋는다. 이제부터 초원은 단장을 시작하고 그 위를 노니는 소, 말, 양, 낙타, 야크...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할 풍성한 식탁이 차려지는 시절이 되어간다.

여기는 이 천여 년 전부터 길고 긴 세월 동안 이민족(異民族)들의 나라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며 한족(漢族)을 위협하기도 하고 화친(和親)하기도 하며 서로가 공존하던 땅!

한때 그곳에서 살았던 한 인물의 사연(事緣)이 수 천년 동안 줄곧 중국 문인들의 익숙한 화두(話頭)가 되어 시로 소설로 희곡으로 전해져 온다. 오늘날에도 영화、드라마、음악으로 거듭 재조명 되며 끊임없이 중국의 문화에 살아있는 사람! 그는 바로 고대 중국의 거대한 통일왕조를 형성했던 한(漢)나라 황실의 한 궁녀이며 역대 중국의 4대 미인 중에 하나인 왕소군(王昭君)이다.

漢家秦地月(한가진지월) 한나라 장안(長安)을 비추는 달

流影照明妃(유영조명비) 그 달빛 흘러가 명비(왕소군)를 비추인다

一上玉關道(일상옥관도) 한번 옥문관 길에 올라

天涯去不歸(천애거불귀) 하늘 저 끝으로 가 돌아오지 못하네

漢月還從東海出(한월환종동해출) 한나라 달은 다시 동쪽 바다에서 떠오르는데

明妃西嫁無來日(명비서가무래일) 명비는 서쪽으로 시집가 돌아올 길 없어라

燕支長寒雪作花(연지장한설작화) 연지산 긴긴 추위에 눈은 꽃이 되어 날리고

蛾眉憔悴沒胡沙(아미초췌몰호사) 아름다웠던 그녀는 앙상하게 오랑캐 사막에 묻혀버렸네

生乏黃金枉圖畫(생핍황금왕도화) 살아서는 황금을 주지 않아 마음 뒤틀린 화공이 추하게 그렸고

死留青塚使人嗟(사류청총사인차) 죽어서 남겨진 무덤 청총이 나를 탄식하게 하노라

중국문학사상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는 시인 이백(李白)도 이렇듯 <王昭君(왕소군)>이란 시에서 어김없이 그녀를 그리워하였다. 왜 그토록 중국인들은 그녀를 안쓰러워 할까?

한(漢)나라 역사책 ‘한서(漢書)’에서 처음 그녀의 기록이 보였다. 당시 한나라는 통일을 이룩하고 고조(高祖)에 이어 무제(武帝)에 이르며 북으로 영토를 더 넓히려는 야심으로 이민족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끝내 흉노(匈奴)와의 긴 싸움에서 그들을 정복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하며 공생하게 되었다. 흉노는 늘 한나라가 불안을 느끼게 하는 대상으로 경계를 풀 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황실은 결혼이라는 동맹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배경 가운데‘후한서(後漢書)’,‘서경잡기(西京雜記)’등에 원제(元帝) 때에 궁녀였던 왕소군과 흉노의 군주(君主)인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와의 결혼에 관한 기록이 거듭 전해지면서 이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의 많은 문인들은 그녀를 작품으로 불러왔다.

한나라 원제 때 황실로 들어온 궁녀들은 모연수(毛延壽)라는 화공의 손끝을 통해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고 황제는 그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궁녀를 간택하였다. 모연수는 재능이 있어 황실의 화공이 되었지만 마음이 바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이 권력을 이용해 뇌물에 따라 입궁한 궁녀들을 왜곡되게 그렸다.

빼어난 미모를 가졌던 왕소군은 입궁한 후에 이러한 풍조를 따르지 않았고 그 결과 그녀의 모습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아 황제에게 선택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궁궐에서 세월만 보내다 흉노의 군주인 호한야의 결혼상대로 발탁되었다. 혼인이 결정되고 나서 왕소군의 실물을 처음 본 원제는 그녀의 빼어난 미모에 놀라고 안타까워했지만 외교적인 관계 때문에 그녀를 보내야만 하였다.

나라의 명(命)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낯선 이국(異國) 땅으로 시집을 가야 하는 왕소군은 처음에는 힘겨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혼을 흡족해하는 호한야의 마음을 얻어 양국(兩國)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고 자연스럽게 그녀는 한나라의 안녕을 지키는‘평화의 대사’가 되어있었다.

흉노의 나라로 간 그녀는 한나라 ‘황제의 여자’가 되지 못한 한(恨)을 품고 울분과 원망에 젖어있지만 않았고, 또 자신의 미모만을 믿고 ‘군주의 여자’로 향유하는 자리에 앉아만 있지도 않았다.

남편의 나라를 위하여 몸소 가르치고 실천하며 한나라의 문물을 전파하면서 그 나라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그러던 중에 첫 남편이 죽게 되자 고국(故國)으로 돌아오기를 소망했지만 한나라 황제의 명령을 다시 따르며 흉노의 법도에 따라 죽은 남편의 전처(前妻)의 아들인 새 군주인 선우 복주루(復株累)와 재혼을 하였고 조국인 한나라의 평화 유지를 위한 애국자가 되어서 인생을 그곳에서 마치게 되었다.

왕소군의 결혼 후의 행적과 이러한 인생에 대한 태도와 품성이 후대에 전해지자 모습만 예쁜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하는 마음’의 소유자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그녀의 ‘충(忠)’에 사람들은 깊이 감동하였다.

또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칭하는 중국의 빼어난 미모의 여인들은 여러 왕조마다 군주들의 곁에서 나라를 기울게 했던 원인이 된 미녀가 대부분 이였지만 왕소군 같은 미인은 역할과 삶이 이렇게 달랐다.

그래서일까? 시대마다 중국의 지성(知性)들은 조국을 지켜내고 나라의 안녕(安寧)을 위하여 ‘평화의 사자(使者)’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먼 이국에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한평생을 살다간 그녀를 그리워하고 애틋해 하는 것인가!

《明妃出塞圖》,台北故宮博物院 소장
《明妃出塞圖》,台北故宮博物院 소장

 


장성미 문화평론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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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아 2019-03-31 15:39:49
읽을수록 더욱 더 흥미를 느끼게 되는 중국 역사이야기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