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반전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반전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19.04.02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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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에서 목숨을 잃은 주로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유가족들이 2014년 7월에 광화문 광장에 세월호 진상 규명을 호소하며 천막을 설치했다. 4년 8개월 만인 지난 달 천막을 해체헸다. 아직도 사건 원인과 대처 와중에서의 의문점들이 남아 있고, 유가족들의 슬픔이야 가실 수가 있겠냐마는, 천막 아래서 5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하며 쌓은 유대가 그 모진 시간들을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유가족의 가슴을 짓누른 건 슬픔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특정 정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색깔을 덧씌우기도 하고, 단식투쟁을 할 때 닭고기 파티를 옆에서 여는 중세기에나 나올 법한 유치한 행위도 자행되었다. 특별법 서명을 받던 곳에서 어느 날은 일군의 노인들이 쳐들어와서 서명대 집기를 부수고 유가족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노인들의 소동이 한바탕 벌어지고, 약간 진정된 후에 행패를 부리고 쉬고 있는 노인 한 명에게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박사가 다가가 대화를 시도했다. 정혜신 박사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정신적 트라우마 치료와 위로를 위한 자원봉사 활동을 꾸준히 행하고 있었기에, 광화문 천막에 자주 가 있었다.

"고향이 어디세요?"ᅠ정혜신 박사가 노인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노인은 대화를 하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오래 전 세상 떠난 아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아들과 며느리 얘기까지 했다. ‘거리에 버려진 부서진 장롱 같은’ 노인의 삶 얘기를 들으며 정혜신 박사는 눈물이 차올랐단다.ᅠ그리고 노인이 불쑥 말했단다.ᅠ

"내가 아까 그 아이 엄마(세월호 유가족)들한테 욕한 건 좀 부끄럽지."ᅠ

정혜신 박사가 대답했다.ᅠ

"그런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ᅠ

광화문 천막 현장에서 서명대를 둘러싸고 벌어진 소란에서 정혜신 박사는 피해자였고, 노인은 가해자였다. 피해자는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고, 사과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사건과 관련 없어 보이는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고, 그로부터 대화를 하며 얘기를 들어주기만 했다. 자신의 신산했던 삶과 현재의 곤고한 상황을 털어놓던 노인은 스스로 자기의 행동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본인이 행패를 부린 유가족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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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회사의 홍보실에서 신입사원 테를 벗지 못하고 일을 하던 시절이었다. 언론 담당 직원들이 회사 소속 기사가 모는 차를 타고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돌리곤 했다. 어느 날 대학교 몇 군데를 내가 다녀야 해서, 보도자료 돌리던 차를 내가 타게 되었다. 승용차 뒷좌석에 타자마자 툭 말을 던졌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언제 왔어?” 그렇게 시작하여 몇 가지 질문 끝에 내 나이를 물었다. “아, 나랑 같은 띠네. 내가 말 놓아도 되겠네.” 그전까지 계속 반말을 하고는 새삼 그런 말까지 했다. 이후 그 기사 아저씨가 인생 역정 얘기를 하고 주로 나는 듣는 편이었다. 지방에 있는 학교까지 세 학교를 돌고 저녁 무렵에 회사로 들어오는데, 의식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부터 그 아저씨가 내게 계속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이후 우리 사무실에 들를 일이 있으면 그 아저씨는 나에게만은 깍듯하게 존댓말로 인사했다. 한 선배가 물었다. “저 사람이랑 모두 한바탕 싸웠는데, 너한테는 어떻게 저렇게 존대를 하지?”

기사 아저씨가 처음에 만나자마자 툭 던지는 반말이 선배들과 싸우게 되는 발단이었다. 자신이 태우고 다녀야 하는 직원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학력에 의해 결정되던 직급 구조 하에서 아래일 수밖에 없었던 아저씨는 반말로 도발하면서 숱한 전투를 치르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 같다. 그런데 소심하여 반말거리도 나이 차이가 나니까 의당 그러려니 하고 들은 내게는, 자신의 얘기를 한껏 부어놓고 나서, 매너를 갖춘 기사로 최고의 서비스를 내게 제공했다.

자신의 제품과 서비스가 최고라며 소비자들의 눈과 귀에 집중포화를 퍼붓는 기업들이 많다. 그럴 몰라주는 게 야속하고 안타까워 더욱 그런다고 한다. 소비자들의 마음을 바꾸는 반전은 그렇게 강력하게 외쳐댄다고 벌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업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소비자 자신에게 집중하여 얘기를 들어주는 게 필요할 때가 많다. 그 얘기를 들어준 데 대한 보답을, 당신의 요구하지 않더라도 먼저 나서서 챙겨 내주는 경우가 많다.

※ 참고서적: <당신이 옳다> (정혜신 지음, 해냄 펴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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