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전투에서 지고 역사에서 승리하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전투에서 지고 역사에서 승리하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19.04.15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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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양공 동상 / 네이버
송양공 동상 / 네이버

송 양공(宋襄公)은 기원전 600년대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의 군주였다. 송나라는 작은 나라였지만 송 양공은 춘추시대 국가들 모임의 의장 격인 패자(覇者) 5명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송양지인(宋襄之仁)’이란 고사(故事)로 유명하다.

송나라와 초(楚)나라가 홍수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일 때였다. 송나라가 이미 강변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초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초나라 군사가 반쯤 강을 건너 왔을 때 공격을 하자고 한 장군이 건의를 했으나, 송 양공은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라면서 물리쳤다. 강을 건너온 초나라 군사가 진을 치기 위하여 우왕좌왕할 때 치자고 했으나, 송 양공은 ‘군자는 남이 어려울 때 괴롭히지 않는다’라면서 물리쳤다. 진용을 갖춘 초나라 군사와 맞선 송나라는 크게 패하여 물러났다.

여기서 ‘송양지인‘이란 말이 나왔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어리석은 대의명분을 내세우거나 또는 불필요한 인정이나 동정을 베풀다가 오히려 심한 타격을 받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래서 송 양공은 어리석음의 대명사로까지 불린다.

그런데 어떻게 그 작은 나라에 어리석음으로 기억되는 인물이 춘추시대 각국의 대표로 회맹을 이끄는 패자로서 이름이 거론되게 되었을까. 패자라는 사람 중에 송 양공과 같이 작은 나라 출신은 없다. 모두 뭔가 번듯하게 토지의 광대함이나, 군사의 용맹스러움이나, 오랜 역사, 발전된 경제 등 내놓을 것이 확실한 국가들이었다. 송나라는 그런 것이 없었다.

작은 나라 송의 군주로서 송 양공 개인은 ‘사사로운 일보다 예를 중시하는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말로만 예를 외치며, 이상을 부르짖는 사람이 아니었다. ‘송양지인’으로 어리석음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는 홍수전투에서의 송 양공의 행동을 송 양공에게 긍정적으로 다른 방향에서 해석하면, 그는 절대절명의 전쟁터에서도 눈앞의 승리 기회에 연연하지 않고 예를 지킨 사람이었다.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장웨이 지음,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펴냄, 2011)에서는 홍수전투에서 송 양공의 행위를 이렇게 예찬한다. ‘생사존망의 긴급한 시점에서 의리를 지키고 전쟁의 규범을 따를 수 있었다는 것은. 인성 가운데 가장 고귀한 측면을 구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강한 항심(恒心)’이 있어 가능하고, ‘결과만 따지고 수단은 따지 않는’ 보통의 인간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예에 대한 항심이 있었기 때문에 송나라라는 약소국의 송 양공이 바로 훨씬 강대한 국가의 군주들을 제치고 패자의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나는 본다. ‘예(禮)’는 당시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분이다. 군주 중에서 그 ‘예’의 최고봉이 나섰으면 함부로 어느 누구도 군사력과 경제력과 같은 물질적인 것만 믿고 내칠 수가 없다.

송 양공에게는 ‘예’가 바로 그의 브랜드였던 것이다. 그 브랜드로 그는 송나라의 당시 형편을 생각했을 때 감히 바랄 수도 없는 패자의 자리에 올랐다. 송양지인의 배경이 된 홍수전투에서 송나라와 초나라의 군사력 등 여러 형편을 고려했을 때 아무리 준비가 되지 않은 초나라 군사를 송나라 군대로 친다고 하더라도 결국 최후의 승리는 초나라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초반전에서의 약간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이 평생을 두고 쌓아온 ‘예(禮)의 송 양공’이라는 브랜드를 망가뜨리는 것은 악수 중의 악수요, 근시안적이다. 송양지인이란 눈앞의 전투에서 지면서 역사에서의 승리라는 반전을 이룬 사례로 기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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