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1910년 한국 최대의 옥외광고 (높이 20m?)는 록펠러의 석유 광고였다

[신인섭 칼럼] 1910년 한국 최대의 옥외광고 (높이 20m?)는 록펠러의 석유 광고였다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19.05.09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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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옥외간판은 1910년에 세운 미국 스탠더드 석유회사(Standard Oil Company)의 솔표 석유 광고였을 것이다. 세운 장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틀림 없이 서울 4대문 안에 있었을 것이다. 가장 높은 간판이라는 이유는 이 광고 탑 아래 창문 두개가 있는 곳을 자세히 보면 세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서 있다. 이 사람의 크기로 간판 높이를 짐작하면 족히 15M 쯤은 될 것 같다. 물론 광고탑 지붕 위에는 글씨가 있는 작은 간판 같은 것까지 계산한 것이다.

어째서 그런 광고탑이 섰을까? 110여년 전의 이야기가 된다.

미국과 통상조약이 체결된 것은 1882년으로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은 1876년보다 6년 뒤이다. 록펠러가 스탠더드 석유회사 (Standard Oil)를 창립한 것은 1860년이었다. 그로부터 10여년 사이에 그는 미국 시장을 완전히 독점했고, 바깥 세상을 내다 보고 있었다. 그가 회사 이름을 Standard로 한 것은 자사의 제품이 표준이 된다는 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스탠더드는 세계 진출, 즉 다국적화의 첫발을 내딛었다.

한국에 스탠더드 석유의 제품은 일본을 경유해서 수입되었다. 일본에 진출한 해가 언제인지는 알아보지 않았으나, 1886년에 한국에 수입된 스탠더드의 석유가 101,207 갤런, 약40만 리터라는 기록이 있으니 그 이전일 것이다. 11년 뒤인 1897년이 되자 한국의 석유 수입량은 200만 갤런으로 폭증했다. 불과 10년 사이에 수입량이 20배나 증가했으니 놀라운 일이다.

1910년 한일합병의 해에 실시한 인구조사(호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1910년 한국의 가구수는 280만이고 인구는 1,300만이었다. 석유는 등유로 사용되었다. 석유 값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1886년에는 한국 가정에서 석유를 사용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10년 뒤 19세기 말에는 집집마다 거의 모두 석유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등잔불은 가고 석유 램프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도 서울의 밤거리도 조금은 밝아졌을 것이다.

일본을 거쳐서 스탠더드의 석유가 들어왔다고 한 이유는 1903년 10월 28일 황성신문에 게재된 <솔표석유방매조합 근고(松票石油放賣組合 謹告)>라는 광고에 솔표 석유 판매점의 간판이 있는데, 미국 <스탠더드> 상회 제조라는 말이 일본 글인 <가타가나>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MADE IN U.S.A.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밤을 밝히게 되었고, 아마도 한국 최대, 최고였을 옥외광고 탑이 덩달아 한양 거리에 우뚝 섰다. 신미양요(1871)로 강화도에 침입한 미군이 물러가고 대원군의 명령으로 한국 도처에 척화비가 서던 기억이 사라지기도 전이었을 것이다.

솔표 석유 광고탑

그런데 판매점 간판 밑에 나와 있는 솔표유(松票油) 표기가 재미 있다.

송표 석유는 대청 외에 대한 언문을 이하야 여좌 부기홈

松票 石油는 大淸 外에 大韓 諺文을 以하야 如左 附記홈

솔표유 시댄다더외일콤파니아뿌 누역

솔표유 Standard Oil Company of New York

인내심을 가지고 풀이한 것이 위와 같다. 우스우면서도 퍽 신경을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대청(大淸)의 말인 한문 밖에 대한(大韓)의 글인 언문(한글)로 표기한다는 말이다. 그 다음 줄은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영문을 한글로 표기한 것인데 신라시대 이두문자 풀이 만큼 힘든 표기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이 표기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인섭 (전)중앙대학신방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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