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누가 절개를 지켰는가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누가 절개를 지켰는가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19.05.13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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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전도비 /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 삼전도비 /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가 병자호란이라고 부르는 난리의 슬픈 클라이맥스는 인조가 농성하던 남한산성에서 지금의 잠실 쪽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숭덕제(崇德帝-홍타이지)에게 행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였다. 예를 주관하는 이의 명령에 따라 세 번 무릎 꿇고, 그때마다 세 차례 머리를 땅에 대며 절을 하는 항복의 의례이다. 정상들 간의 격식 차린 삼전도에서의 의식 이후, 청군들의 말발굽 아래에서 조선 양민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롱테일(long tail)처럼 길게 오래 지속되었다.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소빙하기라고까지 부르는 1600년대 중반의 혹독한 겨울 날씨에 노출된 채 북쪽으로 끌려갔다. 30만에서 60만까지 이르는 수십만 명이 피로인(被擄人)으로 잡혀갔다고 하는 게 우리가 배운 정설인데, 서울대 구범진 교수는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지 펴냄, 2019)에서 그 숫자가 과장이며, 아무리 많이 잡아도 수만 명 수준이라는 걸 입증했다. 그러나 같은 책에서 구 교수가 언급했듯이 ‘수십만 명이 되어야 비로소 비극이 되는 것은 아니’고, ‘수만 명이라고 해서 비극의 정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사실 비극을 더욱 심하게 만든 건 청나라에까지 끌려갔다가 온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조선인, 특히 사대부라고 하는 이들의 태도였다. “잡혀간 것이 본심은 아니지만 이미 정절을 잃어 대의가 끊겼으니 억지로 결합하게 할 수 없다”와 같은 말을 그나마 청군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온 여성들을 봐주는 척하면서 내뱉었다. 오히려 청군이 절개를 지키는 조선 여인들의 자세에 경의를 표하는 기록이 나온다.

삼전도에서의 항복 이후 8년이 지난 1645년 4월말 만주로부터 중원까지 석권한 청군이 장강(양자강) 바로 북쪽의 명대에 소금산업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양주성에 들이닥쳤다. 사가법이란 인물이 양주성 수비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청군은 수차례 항복 권유를 했지만, 사가법의 대답은 빗발치는 화살과 유럽식 소형 대포 포탄이었다. 청군이 만주를 떠나 중국 땅으로 들어온 이후 최대의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그런 저항도 잠깐이었다. 토산처럼 쌓인 청군 자신들의 시체를 밟고 성벽 위로 뛰어 올라온 청군은 순식간에 양주성을 점령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당한 피해에 대한 보복인지 공식 명령으로 5일 동안 마음대로 도륙할 것을 허가했다. 고삐가 풀린 병사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약탈과 학살과 강간은 십일 동안 자행되었다. 그 와중에 청군에게 아양을 떨면서 약탈물들을 나누어 가지던 여성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들 여성들에게 청군이 호통을 쳤다.

“우리가 고려(조선을 말한다)를 정복할 때에, 고려 부녀자 수만을 포로로 잡았는데, 절개를 버리고 몸을 내맡기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어찌하여 당당한 중국이 수치를 모르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我輩征高麗,擄婦女數萬人,無一失節者,何堂堂中國,無恥至此)?”

이런 말을 청군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온 며느리에게 차마 조상의 제사를 맡길 수 없다며, 아들과의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왕에게 호소하는 조선 대신들이 들었다면 마음이 좀 달라졌을까. 위의 말을 한 청군은 “안타깝도다. 중국이 이리 어지럽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呜呼,此中国之所以乱也)!”라고 외쳤다. 절개의 잣대를 다른 곳에 들이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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