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와 춤을] 기부광고, 파놉티콘의 시선

[광고와 춤을] 기부광고, 파놉티콘의 시선

  • 황지영 칼럼리스트
  • 승인 2018.11.2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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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아프리카를 만나는 익숙한 방식. 숨겨진 아프리카의 내면을 노골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상적인 의례. 게릴라처럼 텔레비전 시청시간을 점령하고 있는 기부광고들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보아왔던 왜곡되고 정형화된 기부광고의 표현방식은 한 가지 전제에 기대고 있는 듯하다. 잠재적인 기부자들의 감정이입이 기부확률을 높인다는 전제 말이다. 하지만 적절한 선을 넘어버리면 우리는 괴로운 상황을 회피하고 기부대상과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기부광고가 거부되는 감정이입의 패러독스에 빠질 수 있다.

그런데 기부광고는 감정이입이란 전략에 충실한 것 같지도 않다. 기부광고에서 구축되는 것은 감정이입을 무력화하는 공간적 분할이다. ‘여기’ 풍요의 땅 자본주의와 연결되지 못하는 ‘저기’ 참혹한 땅 아프리카가 재현하는 것은 ‘우리성‘이 아닌 ’타자성‘이다. 자본주의는 ‘정상성’, ‘건강함’을 의미하는 반면 아프리카는 ‘비정상성’, ‘불구성’, ‘병듦’을 의미한다. 이러한 비정상성과 불구성은 그들만의 특유한 문제인 것으로 규정된다. 광고의 어법은 이러하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문제에 책임이 없다. 그럼에도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 시민이면 누구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해결해야 한다. 광고가 주장하고 있듯 그들의 생존은 오직 자본주의 체제에 의존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기부자들을 ‘이타적인 우리’란 동일화의 논리로 묶는 기부광고의 강제적이고 도덕주의적인 명령은 불온하고 불편한 것이다.

타자의 몸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기부광고에서 확립되는 ‘제국주의적 시선’ 역시 문제적이다. 타자의 몸들을 시선의 통제 하에 두는 과도한 하이앵글, 이들의 정신을 검열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등은 수혜자들에게 가하는 일종의 상징적 폭력이다.

이러한 표현방식을 통해 수혜자는 인간다움과 존재론적 가치를 훼손당한다. 그들은 식민화된 주체로 구성되고 영구적인 ‘타자성’을 강요당한다. 이타성과 휴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는 기부광고에서 강화되고 있는 것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기부광고란 파놉티콘의 감시적인 시선은 텔레비전을 마주할 때 마다 우리의 의식을 도덕적으로 검열한다. “15초 후엔 또 한 아이가 사라질 것입니다”, “방금 한 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떤 아이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기부광고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를 ‘기부자’로 호명하면서 재현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는 무엇일까? 저기와 여기를 경계 나누고, 저기 그들의 죽음을 통해, 바로 여기, 우리의 죽음을 안전하게 추방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분리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기부광고는 또 한 번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럼에도 기부광고는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본주의 현실의 구성을 놓고 투쟁하는 복합적인 담론의 장을 개방한다. 우리의 선택지는 2가지다. 소액기부 문화에 건전하게? 발을 들여 놓든지, 아니면 삐딱하게 기부의 선택권 보장을 위한 투쟁의 날을 세우든지.

황지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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