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1928년 단성사 창립 10주년 전단, Dan Sung Weekly NO. 290

[신인섭 칼럼] 1928년 단성사 창립 10주년 전단, Dan Sung Weekly NO. 290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19.07.17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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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 Sung Weekly 290호 표지
Dan Sung Weekly 290호 표지

약 100년 전 1919년 10월 27일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라는 영화가 제작, 상영되었다. 상영한 곳은 단성극장이고, 이 영화 제작비를 댄 사람은 단성사 창립자 박승필(朴承弼)이었다. 7년 뒤인 1926년 “아리랑”이 상영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35년 10월 4일에는 최초의 유성(토키)영화 “춘향전”이 상영됐다. <의리적 투구>가 상영되고 44년이 지난 1963년, 이 날은 “영화의 날”로 제정됐다.

단성사는 1924년(추정)부터 단성주보 (DAN SUNG WEEKLY)를 발행해서 홍보용으로 이용했다. 창립 10주년이 되는 1929년 10월에는 멋진 그림이 있는 DAN SUNG WEEKLY 290호가 발행됐다. A4 용지의 절반 크기보다 약간 작은, 흔히 16절지라고 부르던 크기인데 8 페이지 주보였다.

Dan Sung Weekly 290호의 박승필 사장 인사 말과 금주의 프로그램

3 페이지에는 “단성사 개관 만10주년을 마지면서. (團成社 開館 滿10週年을 마지면서)”라는 박승필 사장의 인사 말이 있다. 91년 전의 글 소박함이 느껴진다.

해마다 마저오든 기념식이 한번 두번 가는 줄 모르게 십년을 맛게 되엿습니다. 녜 -- 그저 제가 무슨 재됴가 잇고 실력이 잇겟습닛가. 여러 손님께서 한결갓치 단셩사를 사랑하여 주신 은택이외다. 십년이 하로갓치 입때까지 유디하여 온 것을 생각하오면 참으로 감개무량이외다. 압흐로도 기리기리 우리 단성사가 엇더한 파란과 굴곡이 잇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계신 다음 꾸준이 나아갈 것을 밋을 뿐이외다. 십년을 마지면서 변변치 안은 몃마듸 말슴을 엇줍게 되엿습니다. (원문 대로 적었으나 현재는 없는 글자는 지금 사용하는 글자로 바꾸었으며 띄어쓰기는 고쳤다.)

이런 인사말 밑에 금주의 프로그램 (12월 21일 ~ 25일)이 있다. 7시, 8시 반, 9시 50분 시작하는 영화 이름과 함께 해설자의 이름이 있다. 해설자란 흔히 변사(辯士)라 했으며, 이름 난 변사는 서울 장안의 이름 난 기생의 연모 대상이기도 했다. 이런 영화 외에 영화 축하 음악이 있었는데 바이올린 독주와 하모니카 독주가 있었다. 연주자는 단성 구락부(클럽) 회원이었다. 1929년 10월 24일에는 단성영화구락부(團成映畵俱樂部) 창립 기념식이 있었는데 회원의 수는 300여명이었다. 그러니 단성사란 단순한 영화관 만은 아니었고, 회원 클럽과 아울러 밴드까지 갖춘 고급 사교 클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프로그램전단 4 ~ 5 페이지에는 상영하게 될 영화 소개가 있는데 이 날 제목과 첫 단락을 보면 멋진(?) 문장이 나온다.

290호의 2페이지와 7 페이지의 프로그램 소개
290호의 2페이지와 7 페이지의 프로그램 소개

“신춘에 공개될 본사의 명화진(기 1) (新春에 公開될 本社의 名畵陣(其 1)

활약기가 온다. 권토중래의 활약기가 온다. 본사는 앞으로 신년 벽두를 위시하여 최시(最始)의 대활약을 비롯할 것이다. 보라...

 

단성사에서는 그 뒤에 벤허 (Ben Hur)가 상영되었다. 그런데 그 예고가 멋있다.

“영화 창시 후 인류가 자랑할 수 있는 영화 중의 최대 작품!

전혀 경이적 걸작!”

벤허(Ben Hur)를 소개한 단성사 전단
벤허(Ben Hur)를 소개한 단성사 전단

벤허는 중학교와 기독교회의 단체 관람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아마도 서울 장안의 대단한 화젯거리였던 모양이다. 단성사는 조선극장, 우미관을 합해 서울 시내 3개 밖에 없었던 한국인이 경영한 극장 가운데 하나였다. 상영된 영화 가운데 우리가 만든 것은 적고 일본 영화도 있었으나,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미국 영화였다.

1926년 10월 1일 나운봉의 <아리랑> 개봉으로부터 광복 후 1947년 "다시 보자 아리랑"까지 재개봉, 재상영, 동시 상영, 특별상영 등으로 20여년 간 31회나 아리랑을 상영해 아리랑이라는 민족의 노래 제목을 이어 간 단성사였다. 단성사를 ”아리랑 극장“이라 부르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민족극장“이란 호칭도 생겼다.

그 단성사를 2016년에 ‘세계 1위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인수해 새 사옥을 지었다. 이 세계 최고의 모자 왕이 한 말이 인상적이다. 2013년에 국세청에서 34명이 나와서 덮쳤는데, 외국에 빼 돌린 것이 없나 조사하려는 것이었다. ”1달러라도 해외 계좌에 넣어 본 적이 없다. 조세 피난처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뉴욕, 홍콩, 동경, 런던에 1달러라도 빼돌렸으면 내가 이 회사를 나라에 바치겠다“고 한 백 회장의 말이 있다 (조선일보 2016년 7월 16일). 모든 자산 사회에 바치고 돌아간 유한양행 창설자 유일한(柳一韓)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민족극장“ 단성사가 한국이 낳은 6.25 한국전 때 단신 월남한 ”세계 모자왕“에게 넘어갔으니 역사란 재미 있다고나 할까.

옛 단성사 (왼쪽, 조선일보 13년 12월12일자)와 현재의 단성사
옛 단성사 (왼쪽, 조선일보 13년 12월12일자)와 현재의 단성사

 


신인섭 (전) 중앙대 신방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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