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한국 광고대표단 1968년 국제광고회의에서 일어난 “위기관리”

[신인섭 칼럼] 한국 광고대표단 1968년 국제광고회의에서 일어난 “위기관리”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19.09.25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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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전 국제광고회의에서 일어난 이야기다. 1968년 6월 26일~29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페더럴 (Federal) 호텔에서 제6차 아시아광고회의가 개최되었다. 말레이시아가 개최하는 최초의 국제 광고회의로 말레이시아 정부는 적극 지원했다. 회의 슬로건은 <더욱 효과적인 아시아 커뮤니케이션 (Towards More Effective Communication in Asia)>이었다. 본회의가 끝난 뒤, 이틀 동안 싱가포르에서 분과 토의도 있었다. 개막식은 말레이시아 부총리의 개회 연설이 있었는데 풍성한 저녁 식사를 겸했다.

이 회의에는 한국 광고계는 대표단을 구성해 9명이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는 서울에서 광고대행사를 시작한 죤 C. 스티클러도 (John C. Stickler)라는 미국인도 있었다. 그는 사실상 국제광고협회(IAA) 한국지부 창설의 밑거름 구실을 한 사람이었다. 이 회의와는 별도로 문공부에 등록한 최초의 한국 광고 단체인 <국제광고협회 (International Advertising Association. IAA) 한국지부> 창설증 교부가 있었다.

IAA 한국지부는 1968년에 창설된 이후 1990년대까지 한국 광고의 국제화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했다. 제6차 아시아광고회의에 한국이 대표단을 구성해서 참가하게 된 것도 사실상 IAA 한국지부의 역할 덕분이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여권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힘들던 무렵이었다.

회의 첫날 저녁 개막식에는 말레이시아 부총리가 개회 연설을 했는데, 이 나라 최고라는 페더럴 호텔 (Federal Hotel) 연회장이었다. 호화한 만찬을 겸한 개회식에 참석한 한국 대표단에게는 놀라움 보다는 충격을 받은 첫날 저녁이었다. 광고회의가 그런 장소에서 개최되고, 한 나라 부총리가 만찬을 주최하고, 그리고 개회연설을 영어로 한다는 자체가 1960년대 한국 광고인에게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의 기간 중 한국 대표단 일행이 보고 듣고 겪은 일은 아마 작은 책자를 쓰고도 남을 만큼 다채로웠다. 그 가운데 하나는 개회식이 있는 다음날 개막식(Opening Ceremony)에서 겪은 일이었다. 

1968년 6월 26일 6차아시아광고회 개회식 단상. 회의 심볼과 각국 대표단과 국기를 든 피켓이 보인다. 태극기 앞의 "KOREA"가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1968년 6월 26일 6차아시아광고회 개회식 단상. 회의 심볼과 각국 대표단과 국기를 든 피켓이 보인다. 태극기 앞의 "KOREA"가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1968년 6월 26일 6차아시아광고회 개회식 단상. 회의 심볼과 각국 대표단과 국기를 든 피켓이 보인다. 태극기 앞의 "KOREA"가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1968년 6월 26일 6차아시아광고회 개회식 단상. 회의 심볼과 각국 대표단과 국기를 든 피켓이 보인다. 태극기 앞의 "KOREA"가 중앙이 아니라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개막은 우선 각국 대표의 입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진에서 보듯이 단상에는 20여명의 각국 대표가 앉아 있고 그 뒤에는 피켓을 든 여학생들이 서 있다. 모든 국제회의가 그렇듯이 순서는 영문 알파벳 순서에 따른다. 한국은 KOREA이므로 JAPAN 다음이다. 그런데 사진을 자세히 보면 한국 피켓의 “KOREA”라는 다섯 글자는 피켓의 오른쪽에 나와 있으며 외쪽은 비어 있다.

입장식 무대 뒤에서는 작은 ”국제적 외교 의전 위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왜? 이 무렵에 한국을 South Korea라고 부르는 것은 금지였다. 공식 호칭인 Republic of Korea라 부르게 되어 있었다. 1960년대 말만 해도 South Korea는 North Korea보다 못 사는 가난에 찌든 나라였다. 국민 1인당 1년 소득은 약 5만4천원($169), 수출은 $52억였으니 “한강의 기적“이란 말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북한과의 격차가 뒤집어진 것은 1970년대 초 이후였다. 지금은 풍요의 상징이 된 "South Korea"란 낱말이 1960년대에는 빈곤의 대명사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특히 해외에서 한국 사람이 South Korea라는 말을 사용하다 들키면 처벌 대상이었다. 그런데 한국 밖에서는 (2019년 지금도 그렇지만) 대부분 South Korea 및 North Korea로 부르고 있었다. 마치 동서독을 West Germany와 East Germany라 부르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 말레이시아 광고회의 주최측도 South Korea 라고 쓴 피켓을 만들었다. 그런데 입장식 직전에 이 피켓을 본 당시 우일문화사(UPA) 신창호 회장은 놀랐다. 신회장은 일제시대 <학병>으로 일본군에 갔다가 해방된 뒤 TIME, NEWSWEEK 등 외국 간행물 판매대행을 시작으로 우일문화사라는 기업을 세운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한 국제통 인사였다. South Korea 피켓을 발견한 것은 입장식이 막 시작된 뒤로 한국 대표 입장이 약 10초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피켓을 든 여학생들이 이미 알파벳 순으로 식장에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이 자리에 있던 신회장과 나는 기지(機智)를 발휘했다. South Korea 라 쓴 피켓의 South를 종이로 씌우자는 것이었다. 식의 진행을 담당하던 영국인은 즉시 상황을 알아차리고 종이로 피켓의 South를 스카치 테프로 싸서 위기를 모면했다.

여담이지만 영국/미국 식민지이던 태반의 아시아 나라와 일본의 식민지이던 나라 사이에는 광고에 대한 기본 인식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간단히 말해 그 차이는 문화의 차이인데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사회질서이다. 광고는 상인의 도구이므로 사회 최하계층에 속한다. 내가 1965년 현대경제일보(한국경제)/일요신문사(지금의 이 신문과는 다름) 광고부장이 되었을 때 당시 관습대로 일자리를 옮기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려 군에서 모시던 상관에게 여쭈었더니 그 분 말이 “이 사람아, 대학 나온 사람이 신문사 광고부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데”하던 이야기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진정 광고의 국제화에 접어든 것은 1960년대 말 IAA 한국지부의 창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한국 진출, 지금의 GS Caltex와 당시의 석유공사의 치열한 시장 경쟁이 생기고 3, 4년 사이에 광고대행이라는 신종 업종이 대두한 뒤였다. 그 결과 럭키, 금성사, 삼성전자, 대한 전선, 두산그룹 그리고 그 밖에도 유력 매체사가 광고 대행업에 진출하게 됐다. 광고에 대한 인식에 일대변화가 일어났다.

좀 과장하자면 1968년 쿠알라룸푸르 광고회의 한국 대표단 일행이 겪은 일은 아마도 80여년 전 1883년에 민영익과 홍영식등 한국 대표단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와 비슷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쿠알라룸푸르 제6차 아시아광고회의 입장식 피켓의 “South Korea" 위기는 이렇게 끝났다. 이런 것을 PR에서 말하는 위기관리라고 하면 남들이 웃겠지.

회의 기간 중에 있었던 IAA 한국지부 창설증 수여식
회의 기간 중에 있었던 IAA 한국지부 창설증 수여식

 

 


신인섭 전 중앙대학교 신방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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