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Saatchi)의 추억

사치(Saatchi)의 추억

  • 브라이언 박 통신원
  • 승인 2018.11.2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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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hing personal. Just business.

내가 제일기획에 입사했던 1995년 당시, 회사는 이미 동경, 홍콩, 뉴욕, LA, 런던, 프랑크푸르트에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고, 일본의 하쿠호도 (博報堂), 미국의 보젤 (Bozell Worldwide), 유럽의 사치 앤 사치 (Saatchi & Saatchi) 등과 업무 제휴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의 주 업무는 해외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한편, 제휴 대행사들과의 협력 관계를 검토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사치 앤 사치 (Saatchi & Saatchi)’. 나중에 알고 보니 찰스와 모리스 사치 형제가 시작해서 거대한 글로벌 광고 그룹으로 성장시킨 대단한 회사였다. 당시에 제일기획은 사치와 많은 부분을 협력하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사치와의 제휴 관계를 기존의 계약서를 토대로 검토하고, 곧 만료될 제휴 계약을 갱신하는 일이었다. 당시 해외업무팀 정연승 팀장님과 하석용 차장님의 지도를 받고, 해외 광고팀 및 주재원분들의 자문과, 다른 글로벌 대행사의 사례를 참고하여 보강한 새 계약서를 작성했고, 사업부장님의 결재를 받은 후 사치와 협의 및 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사치 측 협상 창구는 RS라는 미국 사람이었는데, 들은 바로는 노스웨스턴 경영 대학원 MBA이며, 광고주인 삼성전자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RS는 업무상 해외 광고팀 AE 들과 접촉이 잦았지만, 업무팀과는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었고 가끔 사치에 대한 수수료 지급 문제로 광고팀 AE를 통해 문의를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갱신하게 될 계약의 가장 핵심 내용은, 제일기획 해외 사업부의 역할 확대였다. 이것은 해외 사업의 중장기 전략의 관점에서 당연한 방향이었고, 이를 위해 사업부장님께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계셨다. 따라서, 사치와의 계약 갱신 문제는 향후 해외 사업의 전개 방향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일종의 시금석이 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와 반대로 사치의 입장에서는, 특히 RS의 입장에서는 제일기획의 역할 확대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사치의 수익 감소는 물론 자신의 실적 감소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RS를 통한 사치와의 협의는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보젤은 우리와 협의를 거쳐 우리 안을 받아들였고, 마이클 앤더슨 씨가 직접 사업부로 내방하여 계약을 잘 마무리 지었다.

나중에 사치의 RS도 사업부를 방문하여 업무팀이 동석한 가운데 사업부장님과 협의를 가졌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RS는 그 자리를 그동안 쌓였던 우리에 대한 불만 사항을 늘어놓는 자리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 미팅에서 보였던 그의 톤 앤 매너 (Tone and Manner)는 전혀 프로답지 못했다. 그의 본심은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제일기획을 깔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런 느낌이 들도록 만든 것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 나는 그저 실무자의 입장에서 설명을 했다. 현재의 계약은 곧 종료되기 때문에, 계약이 갱신되지 않으면, ‘법적으로’ 사치와의 제휴 관계는 끝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는 런던 본사와 협의해서 답을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답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치와의 제휴는 법적으로 끝났다. 사업부장님은 런던으로 가서 당시 런던 지점의 정승혜 차장,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의 이종표 차장과 함께 사치를 만나 계약 문제를 마무리하고 오라는 지시를 하셨다. 처음 가보는 영국. 히스로 공항 입국 심사는 쉬웠다. 입국 목적을 묻는 질문에, 사전에 팀에서 교육받았던 대로, 삼성 비즈니스 때문에 왔다고 하니, 미소를 지어주며 고맙다고까지 하면서 일 잘하고 가라고 쉽게 보내줬다.

다음날 아침, 택시를 타고 사치 본사로 갔다. 외국 대행사 본사에 와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기다리는 곳이 마치 어떤 멋진 카페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만날 사람은 바로 RS였다. 언제 또 런던에 왔는지…. RS의 안내로 회의 테이블이 있는 평범한 회의실로 갔다. 인사를 나누는 정 차장님의 영국식 영어 억양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종표 차장님도 RS와 친하셨다.

회사가 너무 멋있다는 둥 너스레를 좀 떤 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현재 상황과 새 계약 내용을 브리핑했다. RS는 내 오른 편에 앉아있었는데, 언뜻 보니 별로 집중을 안 하는 듯했다. 오른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걸치고 의자를 내 쪽으로 돌려 앉아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내 할 말을 끝내고, 오늘 협의를 잘해서 계약 문제를 종결지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잠시 말이 없던 RS는, 굳은 표정으로 불만 사항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나는 의심이 갔다. ‘과연 이 사람이 계약 문제를 회사 차원에서 보고를 하고 입장 정리를 하고 나온 것일까?’ 나는 다시 특별히 이 미팅은 계약 문제를 협의하고 종결하기 위한 미팅이라고 상기시켜줬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칠 생각을 않는다.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얼굴도 붉어졌다. 정 차장님, 이 차장님도 이런 상황에 대해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다시 말했다. “계약에 대해 얘기하자.” 그 순간, 이 사람이 갑자기, “그러니까 이것부터 해결을 하란 말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연속해서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쾅, 쾅, 쾅 내려쳤다. 그가 F­­---라고 욕까지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안 했기를 바란다.) 그의 두툼한 손바닥의 다음 타깃이 바로 옆의 내가 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그런 험악한 분위기였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행동을 할까?’ 이유가 순간 궁금해졌다.

내가 반응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몇 초가 안 됐던 것 같다.

쾅! 나는 테이블을 더 세게 때렸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바로 옆에서 나를 향해 돌아앉아 있는 RS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나도 고성을 질렀다. “너 왜 테이블을 치고 난리냐? 네가 테이블을 치면 나는 못 치냐?” 쾅! 다시 한 번 힘을 다해 내리쳤다. “너 지금 계약 끝난 거 알지? 그러니까 계약을 하자고 내가 온 거잖아! 왜 계약 얘기는 안 하고 딴 소리만 하고 난리야! 너 우리하고 일 그만하고 싶냐?” 쾅! 나는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테이블을 내려쳤다. 받은 대로 돌려주는 거였다. 나름 속이 후련했다.

나의 이런 과격하고 무식한 반응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RS뿐 아니라 이 차장님과 정 차장님도 큰 충격을 받고 멘붕 상태인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RS에게 확인 사살을 했다. “너 방금 우리한테 한 언행이 사치 본사의 공식 반응이라고 이해해도 되겠냐?” 그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아무 말 못 하고 나를 노려보더니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서 회의실에서 나가버렸다.

두 차장님은 당황하셨다. “박 차장, 왜 테이블을 치고 그래?” 정 차장님이 물으셨다. 나도 그제야 조금 열이 올라왔다. “아니, 말로 하지 왜 테이블을 치고 난리를 칩니까? 버릇이 못되게 들었네요. 지가 테이블을 치면 나는 못 치나요?” “박 차장, 사업부장님께 무슨 지시받고 온 거 있어?” 이 차장님께서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자근자근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없었다. 단지, 나의 관용의 한계를 뛰어넘는 무례한 행동에 나의 방식대로 대응한 것뿐이었다.

잠시 후에, 그가 씩씩거리면서 들어왔다. 세수도 좀 하고 혼자 분을 삭이고 온 것 같았다. 그가 사과를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랬다면 나도 같이 사과했을 텐데, 사과한 기억이 없다. 회의실에 수류탄 한 방이 터진 것 같은 분위기에서, RS는 분명 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떨리는 목소리로, “계약 건은 회사에 보고하고 피드백을 주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점심을 예약해놓았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분위기상으로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두 차장님께서는 사치와 일 관계로 친분도 있고, 나도 런던까지 왔는데 사치가 내는 공짜 점심이라도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OK를 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공짜 점심은 더 맛있는 법이지 않은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시가도 한 대 주문해서 피웠던 것 같다. 사치의 비용으로 말이다.

출장에서 돌아와 사업부장님께 보고를 드리니, RS에 대해 물으셨다. 이미 런던에서의 해프닝은 보고받으셔서 알고 계셨다.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 사람하고는 일 못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 수고했어.” 사업부장님은 그날 런던 시간에 맞춰서 사치 본사 고위 임원에게 전화를 하셨고, 사치 측 담당자, 즉 RS의 교체를 요청하셨다. 사치 측의 대답은, “우리에게 알려줘서 정말 고맙다. 조치하겠다.”였고 즉시 그렇게 조치가 됐다. 그리고 계약은 우리의 안 그대로 체결됐다.

한참 후에, RS를 서울에서 만났다. 삼성전자의 월드 와이드 올림픽 파트너 계약 (TOP 계약)을 위한 TF 팀 (탱고팀)에 파견돼서 남대문 빌딩에서 일하던 때였는데, 근처 일식집에서였다. 그가 있었다. 못 본 척할까 하다가, 인사를 했다. 나를 알아봤다. 역시 뒤끝이 상당히 있는 친구였다. 그저 인사나 하고 자기 갈 길 가면 될 것을 그는 굳이 한 마디를 했다. “그때 런던에서의 일은 상당히 불쾌 (unpleasant) 했었다.”고. 나는 이렇게 대답해줬다.

“Nothing personal. It was just business. Take care.”

브라이언 박 : 전 제일기획 국제사업부 차장, 전 이노션 캐나다 관리 총괄, 현 캐나다 재정투자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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