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한글"이 없다면 우리 - 광고를, 홍보를 어떻게 썼을까?

[신인섭 칼럼] "한글"이 없다면 우리 - 광고를, 홍보를 어떻게 썼을까?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19.10.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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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9일 대한민국 광복 70주년 되는 날 간송(澗松)미술문화재단의 기획으로 교보문고가 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 解例)를 출판했다. 그 이름이 나타내듯, 사례를 들어 훈민정음을 풀이한 책이다. 표지를 합해 모두 36장, 72페이지인데 첫 장에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리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로 시작되는 첫 단락이 나온다. 글자를 새로 만들었으니 그 글자를 사용한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림에서 보듯이 용자례(用字例) 다음 첫 줄 기역과 키읔 즉 후음에는 감(柿)과 콩(豆), 다섯째 줄 니은에는 노로(노루. 獐) 따위 차례로 나와 있는데 한문으로 그것이 무언인지를 설명했다.

訓民正音 표지와 첫 장
연월과 정인지의 이름을 표시한 페이지
연월과 정인지의 이름을 표시한 페이지
새로 만든 글자를 사용한 사례를 표시한 페이지
새로 만든 글자를 사용한 사례를 표시한 페이지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를 간송미술문화재단의 창시자 전형필(全鎣弼)이 사서 보존하고 발표한 것은 1940년이었다. 이 책 마지막에는 당시 중국 명나라 연호, 연도와 달과 순(旬) 및 이 글을 쓴 정인지(鄭麟趾) 이름이 나와 있다. 음력으로 표기된 일자를 양력으로 바꾸어 정한 것이 10월 9일이었다. 그리고 해방된 1945년 10월 9일이 새로 제정된 한글날이 되었다. <그림 1>에는 훈민정음(訓民正音) 표지와 첫 장이 한문으로 나와 있다.

한글이란 말을 누가 언제부터 쓰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으나, 한글 과학화의 선구자 주시경(周時經)이 1910년에 시작한 것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한글이 널리 햇빛을 보게 된 것은 서재필(徐載弼)이 한글로 만든 독립신문을 창간한 1896년이었다. 달리 보면 1446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난 뒤 450년 동안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는 말이 된다.

주시경
주시경

강화조약으로 한국이 개항한 1876년 황해도 평산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시경은 1914년 해외로 망명하려던 해에 38세로 사망했다. 그러나 주시경이 남긴 업적은 1926년 최초의 한글날 행사로 나타났다. 당시에는 마땅한 이름이 없어서 <가갸의 날>로 이름지었으나, 뒤에 한글날로 결정되었다.

1930년 11월 19일자 한글날 특집 조선일보
1930년 11월 19일자 한글날 특집 조선일보
1930년 11월 19일 조선일보 한글날 사설

1930년 11월 19일 조선일보는 <한글반포 사백 여든 넷재 돐을 맞으면서> 한글날 특집을 게재했다. 1면 사설은 1, 2, 3 세 단락으로 나누어 이 날의 뜻을 살피고 당면한 일을 적었다. 물론 더러 한문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 사설은 되도로 한글을 사용해서 언뜻 보아도 기사가 눈에 뜨이게 했다.하루 8면을 발행하던 때임을 고려하면 이 전면 특집은 대단한 크기였다. 11월 19일은 1446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음력 9월 29일을 양력으로 바꾼 날이었다. 커다란 글자로 <한글날 484>라는 제목과 함께 이 뜻 깊은 날을 기념하는 글이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깃버하라! 놀애(노래)를 부르자! 춤을 추어라!

이 특집에는 표준문법(標準文法)과 표준사전(標準辭典), 주시경(周時經) 선생에 대한 추모, 우리말에 섞인 한아(漢語), 조선어 연구의 현상(朝鮮語硏究의 現狀) 등 기사가 게재되었다. 또한 오후 6시에 돈의동명월관(敦義洞明月館)에서 축하연(祝賀宴)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한글날 기념 축하연 기사
한글날 기념 축하연 기사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 1941년 12월에는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 전쟁이 이어졌고, 1938년에는 한국어 교육과 사용 금지, 1940년에는 일본식 이름을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강제되었다. 그리고 1942년 원산여자중하교 학생들의 조선어 사용이 발단이 되어 불온한 사상 교육을 했다는 선생이 조선어학회와 관련되어 있음이 탄로되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가 한국독립사상을 고취한다는 사건으로 비화되어 이극로, 이윤재, 이희승, 정인승, 김윤경, 최현배, 안재홍, 안호상 등 33명이 체포되었다. 일부 석방되기도 했지만 2명은 옥사했다. 조선어학회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글이 되살아난 것은 해방 뒤였다.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말과 글, 그리고 나라까지 뺏긴 설음을 겪은 일이다. 90을 넘은 내 나이 14살, 평양사범학교 1학년 때였는데 내 고향 평안남도 경의선 숙천(肅川)역에서 일본말을 몰라 기차표를 못사고 서 있는 아주머니 “통역”을 해 준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같은 조선 사람인데도 일본말 모른다고 기차표 팔기를 거절할 수 밖에 없던 조선인 역무원의 가슴도 아팠으리라 짐작된다.

한글 없다면 지금의 우리 - 광고를, 홍보를 어떻게 썼을까? <한글의 탄생과 역사. 훈민정음 해례본>이란 책 겉장에 쓰여 있는 다음 글은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울러 집을 몇 채 살만한 거금을 투자해 훈민정음 해례를 사서 보존하고 소개한 <민족 문화 유산의 수호신> 간송 전형필의 놀라운 혜안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 ‘훈민정음’ 우리가 알아야 할 한글의 모든 것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 ‘훈민정음’ 우리가 알아야 할 한글의 모든 것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방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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