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10월에 일어난 한국 정치의 반전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10월에 일어난 한국 정치의 반전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19.10.21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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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최소 표차로 당락이 엇갈리며 당선된 이는 누구일까? 거의 6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1963년 10월 15일에 치러진 제 5대 대통령선거에서 승자가 된 박정희 당선자였다. 그가 2년 전에 5·16군사정변을 일으켰을 때의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후보를 득표율로는 1.5%, 표차로는 156,026이라는 초박빙 접전 끝에 눌렀다. 선거 후 분석 결과 윤보선 후보의 패인이 여러 가지 거론되었다. 2공화국의 실정, 지나치게 귀족적인 이미지와 행태, 소수였지만 비슷한 성향의 변영태 후보에게 분산된 표들 등등을 열거했는데, 가장 결정적인 패착은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요즘 같은 여론조사가 일반화된 시절도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판세는 팽팽했다. 뭔가 숨겨두었던 한 방이면 어느 쪽이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선거 전전날인 10월 13일에 친윤보선 후보 성향을 보였던 당시 최대의 신문인 동아일보에서 특별판인 호외를 발행해서 뿌렸다. 윤보선 후보의 소속 정당에서 발표한 자료를 인용하는 형식이었는데, 박정희 후보가 국군 내에서 활동했던 남로당 당원으로 여순사건 이후에 체포되어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는 판결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1963년이면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임시 봉합되고 딱 10년이 지난 후였다. 아무리 정치적 상황이 태풍에 빨랫줄에 걸린 옷들처럼 춤을 춰도, 반공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야말로 국시(國是)였다. ‘간첩’, ‘공산당‘, ’괴뢰‘등의 용어가 쌍욕처럼 일상적으로 쓰이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로당 당원으로 좌익 전력을 가졌다는 건 치명적으로 보였다. 제대로 변명하거나 반격할 수도 없게 선거 이틀 전이라는 시간을 잡은 것까지 치밀하게 세운 최고의 비밀병기이자 신의 한 수로 여겼다.

출구조사도 없었고, 오로지 각 개표소마다 전해오는 결과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소식이 빨리 들어오는 서울을 비롯한 중부권의 선거구 대부분을 윤보선 후보가 휩쓸었다. 승리는 따 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내 고교 시절 선생님으로 1963년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분은 윤보선 후보가 승리했다고 태극기를 흔들며 다녔는데, 나중에 뒤집혔다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을 말씀해주셨다. 박정희 후보의 쿠데타 동료들은 다시 한 번 군대를 출동시켜 뒤집어버리자며 준비에 돌입했을 정도였다. 개표 완료 후에 지역별 득표를 보면 박정희 후보는 호남과 제주도에서 몰표를 얻었다. ‘한국적 매카시즘’이라고 박정희 후보 측이 명명한 윤보선 후보의 사상공세 4·3, 여순, 빨치산 등의 활동으로 당국의 닦달을 당하고 엄청난 피해를 당했던 이들이 반발한 까닭이라고 했다. 운보선 후보로는 결정적 무기로 여겼던 커뮤니케이션 공세가 자신을 찌르는 비수가 되는 반전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상공세를 뚫고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정적, 반정부 인사라고 자신들이 지목한 종교인, 예술인, 학생운동 주역들에게 공산주의자의 낙인을 찍는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1970년대에 만들어 주입시켰는데, 한국적 민주주의를 끌고가는 강력한 추진체가 바로 한국적 매카시즘이었다. 박정희 후보에게 몰표를 주어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호남 지역은 이후 경제적 차별에 시달리고, 1970년대가 되면 박정희 후보측은 ‘경상도 대통령’을 선거전에서 대놓고 부르짖기까지 한다. 그리고 사상공세 커뮤니케이션이 일으킨 의도하지 않은 반전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16년 열흘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가장 가까운 부하의 총에 목숨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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