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지명(地名)으로 꾀하는 반전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지명(地名)으로 꾀하는 반전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19.12.02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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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
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 (출처 위키피디아)

로마 한복판에 '캄포 데이 피오리 Campo dei fiori'란 곳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꽃들의 들판'이란 뜻이란다.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경치를 연상시키는 이름과 달리 이 장소는 중세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시대에 이단으로 판결 받은 이들에 대한 화형이 집행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 사실을 기리기 위해서인가, 광장 중앙에 조르다노 브루노의 동상이 있다.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서 더 나아가 모든 별들이 항성이고 태양도 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우주론에 더하여 그리스도 삼위일체와 신성성에 마리아의 처녀성까지 부정하며 기존 이론과 질서에 반기를 드는 강연을 했다. 종교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재판에 넘겨진 그는 8년 동안 모진 고문이 곁들여진 심문을 받았지만 그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로마법 수업>(한동일 지음, 문학동네 펴냄, 2019) 215쪽에 묘사된 그의 마지막은 아래와 같다.

‘그는 1599년 12월 21일 제 22차 최후 이단 심문에서,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내 주장 가운데 철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600년 2월 8일 나보나 광장에서 무릎을 꿇은 채 판결문을 듣고 있던 브루노는 벌떡 일어서서 재판관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이런 나의 견해를 두렵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여러분은 두려운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입니다."‘

바로 그 다음 날 그의 공개 화형이 집행되었다. ‘꽃들의 들판’의 꽃이 ‘불꽃’이었던 셈이다. 요즘은 이 ‘꽃들의 들판’에 낮 동안에 시장이 들어선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꽃이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름다운 지명 뒤에 의미와 전혀 다른 역사가 서려 있는 곳들이 많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 Place de la Concorde’이다. 잘 알려진 대로 ‘콩코드 Concorde’는 ‘화합’이나 ‘조화’를 뜻한다. 원래 ‘루이 15세 광장’이란 지명을 바꾼 그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루이 16세를 비롯하여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에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곳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며 처형당한 곳이다. 반혁명적 인사들의 뿌리까지 말려버리며 그게 화합에 이르는 길이라고 명명한 이들은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런 피비린내는 그만하고 조화롭게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한 염원을 담아서 그리 명명했을 수도 있다. 마치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투하된 곳에 세워진 ‘히로시마 평화공원’처럼 말이다.

이전에 읽은 한국 단편소설 한 편이 생각났다. 잘 안 팔리는 소설가가 공향 군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친구와 군내의 관광지들을 소개하는 책자를 만드는 얘기였다. 원래 지명에 전설 같은 일화들이나 역사 인물들을 가져다 붙인다. 내키지 않으면서도 밥벌이도 없는 터에 옛 친구를 도와준다고 합리화한다. 그런데 편평한 바위 하나에 공무원이 ‘강간바위’라는 이름을 붙이자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여인을 거기서 강간했다는 식의 설화를 꾸며대는 데는 너무 심하다며 저항한다. 다툼 끝에 소설가는 일을 마무리하지 않고 상경해버린다. 몇 달 후에 소설가는 공무원 친구의 편지를 받는다. 자신이 고집을 부려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래도 소설가의 도움으로 안내 책자와 푯말들을 완성했다고 하며, 마지막에 덧붙인다. ‘강간바위’에서 실제 강간이 벌어져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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