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되는 줄 알면서 굳이 하려던 그 사람

안되는 줄 알면서 굳이 하려던 그 사람

  • 장성미 칼럼리스트
  • 승인 2018.12.03 09: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자초상
공자초상

중국에서 2500년 전 권위를 상실한 천자(天子)는 뒤로 둔 채 제후(諸侯)들이 패권(覇權)을 거머쥐려 분열과 전쟁을 시작하는 시대의 문빗장을 열자, 백성을 구제하려는 논리를 펼치며 변혁을 꿈꾸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구(丘), 자(字)는 중니(仲尼)이며 훗날 모두들 공자(孔子: 공선생님)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공자(孔子: B.C551~B.C479년)가 살다간 72년, 그 세월 중국고대 사회는 참으로 불안한 길목 이였다. 도읍을 동쪽으로 옮기며 새롭게 다잡아 보려 하였지만 주(周)왕실의 권위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약해져 나날이 추락하는 형국에 처했고 천자(天子)는 왕의 이름만 존재할 뿐이었다.

강력한 힘을 지녔던 찬란했던 시절에 ‘세상 천하 어디든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薄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박천지하 막비왕토 율토지빈 막비왕신<시경詩經∙소아小雅∙북산北山>)는 칭송의 노래는 이제 아주 먼먼 옛날의 일이 되고 말았다.

일반사대부(士大夫: 지식인)들의 인식도 변화되어 ‘왕의 신하’가 아닐 뿐 아니라 섬기는 주군(主君)도 각자 다 따로 있어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면 가서 신하(臣下)게 되기를 꺼리지 않았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 제(齊)나라에서 공자(公子: 제후의 아들) 규(糾)와 소백(小白)이 서로 임금이 되려고 내란을 일으켰을 때, 관중(管仲)은 규의 신하였으며 포숙아(鮑叔牙)는 소백의 신하였으나 훗날 제(齊)의 환공(桓公)이 된 소백이 승리하자 관중은 그에게로 돌아섰다. 사대부들의 이러한 선택은 어떤 나라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고 비일비재(非一非再) 하였다.

혼란이 도래한 중원(中原)에서 ‘왕의 땅’, ‘왕의 신하’ 라는 전통 관념이 이미 흐려지고 사람들에게 경시되다 못해 심지어 버려졌다.

공자(孔子)는 주(周)의 제후국 중에서도 주공(周公)의 후예가 다스리는 노(魯)에서 성장하면서 배움에 열심이었고, 나이 서른을 넘기면서는 학생을 가르치기에 열정을 쏟으며 현실을 성실히 살며 힘써 지행(知行)을 실천하려는 지식인이었다.

본래 그는 쇠한 귀족가문의 후예였고,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는 유아기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도우며 어린 가장으로 어렵게 생활해야 하는 형편이라 정해진 선생님을 찾아가 배울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고대(古代)의 책들을 볼 기회가 오면 그의 말처럼 참으로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읽었고, 스승이 계신 곳 이면 누구에게든 어디든 달려가 무엇이든 배움을 얻었다.

이런 열린 생각의 소유자는 가르치는 위치가 되자 배움을 얻으려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신분도 나이도 따지지 않았다. 공자의 이러한 교육관으로 인하여 학문하는 것이 귀족의 전유물에서 평민의 세계로 번져가는 획기적인 계기가 됐다.

한편 공자 역시 ‘왕의 신하’로 살았던 적이 없었다. 그는 노(魯)나라에서 낮은 관리를 하다가 대부(大夫)의 반열(班列)에까지 오르기는 했으나 나라에 등용(登用)되지 못하자 제자들을 이끌고 자신을 맞아 줄 나라를 찾아 제(齊)나라로 진(晉)나라로 채(蔡)나라로 떠돌다 그를 대접해주는 위(魏)나라에서 오래 지냈다. 그러나 결국에는 노(魯)나라로 돌아와 생을 마칠 때까지 교육에 힘쓰며 고대의 문헌을 정리하였다.

"논어(論語)"에 기록된 공자(孔子)의 사상이 정작 그가 살아있을 때는 현실정치에서 그의 ‘꿈’이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났어도 공자의 정신을 따르며 가르치고 배우는 제자들이 끊임없이 나오면서 각계각층으로 나아가 빛을 발하자 세상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훗날 맹자(孟子)와 순자(荀子) 같은 걸출한 제자들이 등장하며 그의 사상을 확충시켰고, 한걸음 더 나아가 묵가(墨家)와 법가(法家)의 사상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담론은 시대 앞에선 지식인의 책임과 고민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이끌어내는 단초(端初)를 제공하였기에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장(場)이 풍성하게 펼쳐지며 중국사상의 큰 줄기들이 춘추전국시대에 완성되게 하는데 또한 영향을 미쳤다.

현실정치의 병폐와 혼란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무척 힘겨웠으나, 다행스럽게도 일찍이 ‘공자’의 ‘도덕적 인간’에 관한 관점이 그들 중국인의 세계에 제시되었기에 유가(儒家)의 학설이 중국사람들의 문화와 실천적 삶의 핵심이 되어 마치 그들 DNA의 하나가 된듯하다.

유학(儒學)사상은 불안하게 요동치던 나라들이 다 사라지고 중원 땅에 통일국가 한(漢)나라가 출현하면서 처음에는 한나라를 이끌어 갈 정치사상으로 유가(儒家)가 도입 되었고 중국의 제도와 전통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심이 되었었다.

그리고 또 다시 왕조가 바뀌고 분열과 통일의 시간이 이어져가는 긴 역사 속에서 중국인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버리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 살아서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중국인의 정신을 지배하면서 중국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그 사람을 여기서 잠시 만나 말해보고 가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요?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不亦說乎(불역열호)?배우고 난 뒤에 일정한 시간 동안 그것을 실습하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

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 不亦樂乎(불역락호)?뜻이 맞고 지향하는 것이 같은 친구(제자)가 멀리서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人不知而不慍(인부지이불온),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사람들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역시 군자(덕이 있는 사람)가 아니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