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우물 속에서 세상 보기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우물 속에서 세상 보기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18.12.04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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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 특히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이들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면 어떻게 할지 궁금해졌다. 단지 전체는 힘들겠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건물 한 동을 그릴까. 아니면 창문 밖에서 보이는 집안을 묘사할까. 거실을 중심으로 한 실내 모습을 그려낼 수도 있겠다. 아파트가 제 1의 주거형태로 자리 잡기 전의 아이들이 그리는 집은 대개가 독채 기와집이었다. 지붕을 그리고, 기둥을 양쪽으로 세우고, 마루를 깔고는 기둥 아래에 주춧돌을 그려 넣으며 마치는 식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배우고, 의당 그렇게 그려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순서를 거꾸로 주춧돌부터 그리는 이들이 있단다.

노인 목수가 그리는 집 그림은 충격이었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도리, 들보, 서가래 ...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 신영복 서화집 <처음처럼> 중 ‘집 그리는 순서’

좁은 소견이나 경험에만 의존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걸 비유하여 ‘장님 코끼리 만지기’란 표현을 흔히 쓴다. 불교경전인 <열반경>에는 ‘군맹무상(群盲撫象)’이라고 하여 직역하면 ‘장님(盲) 무리(群)가 코끼리(象)를 만진다(撫)’가 된다. 만진 부위에 따라 벽, 널빤지, 새끼줄 등으로 코끼리 모양을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장님 무리가 수백, 수천이 되어 코끼리의 모든 부분을 샅샅이 만져보고 자신이 만진 부분에 대해서 한 표현들을 모아서 코끼리를 그려본다면 어떨까. 눈 성한 이들이 얘기한 것을 보고 그린 코끼리보다 더욱 정치한 작품이 나오지 않겠는가. 사실 성한 이들 몇이 작당하여 멀쩡한 사람을 눈뜬장님으로 만드는 ‘세 사람이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란 속담도 있지 않은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비슷한 의미로 ‘우물 안 개구리’란 뜻의 ‘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 속에 앉아서 하늘을 본다‘는 ’좌정관천(坐井觀天)‘이란 속담과 사자성어가 쓰인다. 그런데 우물 안의 개구리가 좁디좁은 우물머리를 통해서 보이는 그 하늘만을 보는 좁은 시야로만 인식할 수도 있지만, 스냅샷이 아닌 롱테이크로 개구리의 시각을 가져간다면 하늘의 온갖 조화를 바라보고 그 원리를 깨칠 수 있는 하늘을 향해 열린 창의 역할을 우물은 하게 된다.

결국 한 꺼풀씩 벗겨서 깊이 들어가면 드넓은 우주의 존재감조차 찾을 수 없는 지구에서, 그것도 200개가 넘는 나라의 하나의 한 지방, 어느 가정의 구성원이란 우물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속에서 우물이 좁다고 한탄할 것인가, 우물을 부수어 버리기 위해서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그 우물 속에서 바깥의 더 넓은 세상과 우주를 느끼며 나 자신을 찾을 것인가가 바로 우물 속의 우리 존재 자체를 규정한다.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넓어지는 듯 좁아지기만 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집은 주춧돌부터 그릴 수 있다. 정말 집을 짓는 이는 그렇게 그린다. 수많은 장님들이 만진 코끼리가 모이면 더 정교한 코끼리가 그려질 수 있다. 우물 속에서도 하늘의 이치를 깨닫고, 나의 존재 각성을 이룰 수 있다. 고정관념이란 구호가 써진 사방 벽을 부셔야 한다. 거기서 반전(反轉)의 싹이 움튼다.

이미지출처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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