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조선일보,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 압수, 정간, 폐간, 그리고 광고의 수난

[신인섭 칼럼] 조선일보,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 압수, 정간, 폐간, 그리고 광고의 수난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0.04.0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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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동아일보 100주년 기념호 1면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대통령 축사 헤드라인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 대통령 축사 헤드라인

조선일보 창간은 1920년 3월 5일이다. 동아일보 창간은 4월 1일이다. 두 신문 모두 1940년 8월 10일에는 강제 폐간을 당했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으로 전시체제 하에서 “국민총동원령”이 나온 뒤였다. 이 동원령 가운데 필요에 따라서 언론을 통제할 수 있는 조항이 있었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 기관지이던 매일신보만 남겨 두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폐간했다. 속되게 말하자면 앓던 이 빼버린 것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 다 빼버렸다.

일장기가 있는 유니폼과 말소된 유니폼을 입은 손기정 선수
일장기가 있는 유니폼과 말소된 유니폼을 입은 손기정 선수
동아일보 폐간사가 있는 신문과 발행 호수
동아일보 폐간사가 있는 신문과 발행 호수

1년을 365일로 기준하면 동아일보는 창간에서 폐간까지 모두 7,430일이 된다. 그런데 폐간사가 있는 소화 15(1940)년 8월 11일호의 호수는 6,819호이다. 조선일보는 6,923호이다. 왜? 조선, 동아 두 신문 모두 4차례의 정간(停刊)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아일보의 경우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승리한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서 일본 국기인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9개월이란 장기간 정간을 당한 일이 있었다. 신문의 정간은 사형선고에 가깝다. 4월 1일 동아일보 A2 사설 면에 보면 발매 금지 63회, 압수 489, 기사 삭제는 무려 2,400여건이었다.

개벽(開闢) 1925년 8월호 광고 게재로 압수 당한 조선일보 사설
개벽(開闢) 1925년 8월호 광고 게재로 압수 당한 동아일보(위) 및 조선일보 사설

1925년 8월 2일 동아일보는 압수를 당한다. 조선총독부 경찰국 자료에 의하면 이 압수는 393건으로 앞에 언급한 동아일보 사설의 숫자보다 10건 가깝게 적다. (같은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조선일보의 압수 건수는 414건이다.) 이유는 개벽(開闢) 잡지 광고 때문인데, 8월호 기사 가운데 해외 독립투사들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낯익은 이름, 서재필, 이승만, 김규식, 안창호, 이시영, 신채호 등이 나온다. 3.1운동 피의 댓가로 얻은 “문화정치”라지만, 조선독립에 관련된 기사는 금기였다. 개벽 잡지는 정간처분을 당했다. 1925년 8월 1일 조선총독 지령 708호인데, 신문지법 21조 “안녕질서 방해” 죄였다. 이 광고를 게재한 동아일보는 압수 당했다. 항의가 지면을 가득 채웠고, 동업지 조선일보는 이 문제를 사설로 다루었으나 소용 없었다.

1974년 12월 26일 “동아광고사태” 때 1면과 광고면이 비어 있는 4면
1974년 12월 26일 “동아광고사태” 때 1면과 광고면이 비어 있는 4면

김인호 광고국장과 부장, 사원 3명이 잡혀갔다. 수많은 격려광고 가운데 “육군중위“라는 이름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인호 국장의 명필 광고 지원 호소문도 나왔다. 무서운 힘을 가진 한국 CIA도 쇄도하는 국내외 격려광고를 막지는 못했다. 

1975년 1월 15일 “본사 광고국장 연행“ 동아일보 기사
1975년 1월 15일 “본사 광고국장 연행“ 동아일보 기사
1975년 1월 1일 김인호 국장의 육필 호소문 및 언론 자유 수호 격려 광고
1975년 1월 1일 김인호 국장의 육필 호소문 및 언론 자유 수호 격려 광고

해방된 뒤 1974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동아광고사태”는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었는데, 대광고주의 광고가 동아일보와 자매지, 동아방송에서 사라진 사건이었다. 언론자유를 부르짖는 신문에 대한 탄압이었다. 사건은 국내에서 온 세계로 확산되었다. 세계 언론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 되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전 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가 영국, 미국, 화란의 식민지이던 시절 그 식민지에서 피지배 민족이 발행하던 신문 가운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처럼 삭제, 발매 금지, 압수, 정간을 겪은 신문이 몇 개나 되는지 궁금하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시작된 중일전쟁 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극에 당했을 무렵 쌀 공출, 예배당 종 강제 헌납, 지원병, 징용, 정신대, 징병, 일본말로 말하지 않으면 기차표도 살 수 없던 시절, 한글 말살을 겪던 시대도 있었다.

우리말 가운데 성을 바꿀 놈이란 욕이 있다. 1939년 11월 15일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이 공표되었다. 시행은 1940년 2월 11일, 이 날은 “성을 바꾸는“ 날이었다. 평산 신씨인 내 이름은 히라야마(平山)로 바뀌었다. 내 나이 12살 되던 해였다.

조선일보는 지난 3월 5일, 동아일보는 4월 1일 100주년 기념호 사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그 암흑기에 민족의 표현 기관으로서 일제 강압과 신문 발행 사이에서 고뇌했던 흔적은 조선일보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100년 비바람을 버텨 온 나무에 남은 크고 작은 상흔이다. (조선일보 2020년 3월 5일 A1 사설 면)

일본 군국주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일제 말 강제 폐간을 앞둔 시기,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압박으로 저들의 요구가 반영된 지면이 제작된 것은 100년 동아일보의 아픔입니다. 정중히 사과 드립니다. (동아일보 2020년 4월 1일 A1 사설 면)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민족의 두 신문 사설 난에 나온 글이다. 지난 날 “일제 강압과 신문 발행 사이에서 고뇌”한 조선일보나 “조선총독부의 집요한 압박으로 저들의 요구가 반영된 지면”을 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 동아 기자들은 다 갔다. 이 두 신문을 민족지라 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두 신문의 100년 가운데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또 그분들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인 “국민과 함께 한 역사”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100년 가운데는 더 많은 가시밭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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