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Mind the Gap'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Mind the Gap'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0.04.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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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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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the gap'은 런던 지하철에서 나오는 안내방송이다. 우리로 치면 '이 역은 지하철과 타시는 곳 사이가 넓으니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을 확 세 단어로 줄여서 말한 것이다. 런던 지하철이 나름 세계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고, 전 세계에서 오는 관광객들도 많고, 런던의 명물 중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다 보니 이 말까지도 사람들에게 상당히 인상 깊게 자리 잡은 것 같다. 한국에서도 어느 기자가 영국에서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내면서, 그대로 책 제목으로 가져다 쓰기도 했다.

1989년 가을에 처음 런던에 갔다. 삼성전자 사내방송의 특집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서 촬영팀과 함께 가기로 했는데, 이상하게 미국 비자가 내 것만 한 번 거부가 되었다가 나오는 바람에 촬영팀보다 이틀 늦게 혼자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때 삼성전자 공장이 런던에서 자동차로 대여섯 시간 거리의 영국 북부 빌링햄(Billingham)이란 도시에 있었다. 촬영팀이 그곳으로 새벽에 떠난 후, 바로 런던 개트윅 공항에 도착했다. 런던 근교에 있던 지점에 가서 인사만 한 후 하루 온전히 혼자서 런던 시내 관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당시 지점에 있던 주재원 과장에게 런던 시내 교통 상황 등에 대해서 얘기를 대충 들은 후 시내로 나갔다. 관광 안내 지도 하나를 얻어서 발길 가는 대로, 예전 책에서 본 내용을 상기하며 돌아다녔다. 지하철을 타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지하철에서 약간은 위협적으로 들릴 정도로 무겁고 단호하게 ‘Mind the gap'이란 ’안내‘보다는 ’경고‘가 어울리는 소리가 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한동안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골똘히 생각했다. 내용이야 뻔한 것인데, ’Mind the gap'인지 ‘Mind your step'인지 헷갈렸다. 후자로 ’발밑을 조심하세요‘라고 생각하고 들으면 그렇게 들리기도 했다. 그날 밤까지 어떤 것이 맞는지 알지 못했다. 다음 날은 빌링햄에서 돌아온 일행들과 함께 런던 시내 스케치 촬영을 차를 타고 다니면서 하고, 세 번째 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 다음 해에는 홍보 영화를 촬영하는 출장 기간에 런던에 들렀다. 그때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여권을 잃어버려 임시여행허가증을 만들고 미국 비자를 다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받고 하느라 촬영팀과 계속 함께하지 못하고, 중간중간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런던은 또 혼자 들어가게 되었다. 촬영팀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나절 시간이 남아서 런던에 있는 친구와 만나 지하철을 주로 타고 돌아다녔는데 지하철에서 나오는 말에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런던에 익숙해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후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미국에 가기 전에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첫 기착지가 런던이었는데, 그때 지하철 안에 ’Mind the gap'이라고 쓰여 있는 포스터 같은 것을 보았다.

‘발걸음(step)'보다 ’틈‘ 혹은 ’차이‘를 의미하는 ’Gap'이 역시나 바른 선택인 것 같았다. 사회적인 의미까지 담은 것 같기도 하다. 광고의 카피, 특히 기업의 슬로건 등에 쓰이는 단어는 너무 구체적이고 명확한 뜻을 지닌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여러 가지로 뜻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어야 한다. 내가 의도한 단어와 사람들이 바로 보거나 듣고 생각하는 것과 약간의 ‘틈(Gap)'이 있어야 한다. 거기서 반전이 생긴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체로 그 틈에 주의를 기울이며 스스로 틈을 메꾼다. 그러면서 나의 브랜드에 대해서 더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된다. 사람들에게 스스로 반전을 만들 여유를 주어야 한다. ’틈을 줘라‘, 곧 ’Give the Gap’하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알아서 ‘Mind the Gap’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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