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화자(話者)에 따라 달라지는 반전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화자(話者)에 따라 달라지는 반전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0.05.18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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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 북스
출처 구글 북스

대한민국 전체가 이틀 동안 전력공급이 끊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 년 동안 전기료가 8배가 오른다면 사람들은 무어라 할까? 정전 사태를 이용하여 미리 축적해 놓은 전기를 20배 이상의 가격으로 파는 기업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파렴치한 이런 일들이 2000년과 2001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중에서 벌어졌다. 냉장창고를 돌릴 수 없어서 짓무른 채소들이 마트에서 썩어나서, 상한 우유가 도랑에 콸콸 버려졌다. 더욱 심각하게 병원에서 수술 기구를 사용할 수 없었다. 수술대에 오른 환자가 속수무책으로 수술대에서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캘리포니아가 침몰한다며 타이타닉에 비유하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어떤 이가 이런 농담을 던지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사태와 타이타닉 사고의 차이가 뭔지 압니까? 타이타닉 호가 물에 잠길 때는 적어도 불은 들어왔다는 겁니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생명을 잃었던 사태를 소재로 삼은 너무나 부적절한 농담이었다. 게다가 더욱 기가 막힌 반전은 저런 농담을 던진 사람이 바로 그 정전 사태를 야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 1990년대 미국 최고의 기업으로 꼽힌 엔론의 최고경영자였던 제프 스킬링이었다. 엔론은 에너지 가격을 조작하고, 전기공급량에 관한 허위 정보를 주정부에 흘려 전기료를 올리고는 전력 부족을 고의로 초래하는 식의 활동을 벌였다. 그 전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엔론의 CEO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소재로 농담을 하며 강연을 시작한 것이다.

이 강연을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미국 유수 경영대학원의 학생들이었다. 이 농담에 MBA를 취득하러 경영대학원에 온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리고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그들에게 제프 스킬링은 최고의 영웅이었고, 롤모델이자 워너비였다. 미국 경영대학원에서 강조하는 ‘비즈니스 윤리 Business Ethics’ 같은 건, 누가 어떤 피해를 보든 돈만 벌고 지위만 오르면 된다는 탐욕의 야성에 휩쓸려 사라져버렸다. 제프 스킬링 같은 인간의 농담보다 그것에 호응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내게는 더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2010년 런던에 함께 출장을 간 후배가 어느 건물에 붙어 있는 엔론 로고를 보고 물었다. “아직도 엔론이 있나요?” 그 건물은 엔론 뮤지컬을 공연하는 극장이었다. 영국의 극작가인 루시 프레블이 쓴 뮤지컬 <엔론>의 첫 장면은 1992년 1월 스킬링의 사무실에서 시작된다. 엔론이 만든 특이한 형식의 석유 회계 처리 방식을 증권거래위원회가 승인한 것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는 장면이었다. 이어 3막에서 스킬링은 엔론의 CEO가 되고, 미국 최고의 비즈니스계 리더로 칭송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5막에서 그는 징역 24년형을 선고받는다.

“정교한 알고리즘 및 수학적 모형으로 무장한 MIT 와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 박사들”이 엔론의 자산이라고 자랑했다. 그들이 만든 혁신이 업계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그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배려심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무엇이든 모형화할 수 있다면서, 자신이 이끄는 비즈니스 혁신의 열차에 초대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가 위의 농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열차는 법정으로, 이어 최종 목적지인 교도소로 향했다.

출처 : 뉴욕타임스
제프 스킬링 (출처 :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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