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반전의 조짐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반전의 조짐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0.10.26 0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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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 “난 지겨워(I am bored)”

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학교 도서관 책상 위에 낙서를 한다.

지겨운 것도 이해하고, 좋지 않은 행동이기는 하지만 낙서하는 것도 이해한다.

다음 날, 그 학생이 도서관 같은 자리에 와서 보니까 자신의 낙서 아래 인사말을 적어놓았다.

“안녕 ‘지겨워’야, 만나서 반가워(Hi bored, nice to meet you)”

여자의 글씨라고 지레 짐작하며 지겹기 그지없던 남학생의 삶에 뭔가 활기가 솟는다.

“짱 재밌네, 빨리 방학 되면 좋겠어(Lol, can’t wait for break)”

학교 다니며 방학을 기다리는 마음이야 학생이면 당연한 것 아닌가.

친구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도 혹시 그 낙서의 주인공이 아닐까 싶어서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유심히 쳐다본다.

남학생은 정체를 모르는 여학생과 도서관 책상의 낙서로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번 여름에 특별한 계획 있어(What u up to this summer)?”

“노잼 계획(nothing cool)”

남학생이 농담으로 응수한다.

“그럼 노잼 계획을 같이 하자(Maybe we should do nothing cool together)”

여학생도 호응한다. “좋아(Sounds good)”

더욱 여학생이 누구인지 궁금해져서 인스타그램도 보고, 수업 시간에 옆에 앉은 여학생에게 괜한 눈길도 던져보나 누구인지 알 재간이 없다. 결국 참지 못한 남학생이 도서관 책상에 쓴다.

“너 누구야(Who are you)?”

그렇게 더 학기 나날이 지나가고 여름방학 날이 왔다.

도서관 책상 위에 질문을 던졌기에 누구인지 확인하려는데, 이미 도서관 문이 닫혀 남학생이 실망하고 돌아선다. 여름방학을 맞아 학생들이 체육관에서 학년을 정리하는 추억록 같은 학기 앨범에 서로 인사말과 이름을 주고받는다. 남학생이 어느 여학생의 앨범에 쓴 글씨를 보고 옆에 서 있던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말을 건넨다.

“야, ‘지겨워’가 너구나(Hey, you must be bored)”

도서관 책상 위의 낙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던 두 남녀가 드디어 만났다.

서로를 확인하는 감격을 누리는 그들 뒤로 체육관 문이 갑자기 열리며 누군가 검은 가방을 가지고 들어선다. 가방을 바닥에 털썩 던져 놓은 그가 소총을 꺼내고 학생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그리고 느닷없게도 자막이 나온다.

"여러분이 에반을 보는 동안, 다른 학생 하나는 총기난사를 계획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While you were watching Evan, another student was showing signs of planning a shooting).“

남학생의 이름이 에반(Evan)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줄이 나타난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But no one noticed).”

영상을 다시 뒤로 돌려보니, 에반이 나타난 화면의 한쪽에 체육관 총격범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도서관에서 총기 잡지를 읽고, 말을 거는 여학생에게 대꾸를 거부하고, 복도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다시 도서관에서 총기 비디오를 보고, 에반이 쭉 훑었던 인스타그램에는 카메라를 향해 총을 쏘면서 “학교에서 보자(See you at school)”이란 텍스트를 붙였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다른 학생에게 총 쏘는 시늉을 한다.

다시 자막이 뜬다.

"조짐만 포착한다면 총기난사는 예방할 수 있습니다(Gun violence is preventable when you know the signs)."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시 가장 괴로웠다는 미국 샌디훅(Sandy Hook) 총기난사 이후에 나온 총기 사고 예방 광고였다. 말이 필요 없는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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