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래의 파파라치] 17세기 어느 수녀의 처세술

[김시래의 파파라치] 17세기 어느 수녀의 처세술

  • 김시래
  • 승인 2019.01.0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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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의 마지막날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나는 여의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식당에서 두 제자를 만난다. 주제넘게 신영복 선생님께서 어린 제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시던 ‘청구회 만남’을 흉내 낸 것이다. 그들은 광고를 인생의 업으로 정했다. 하나는 군대에서도 광고공모전의 입상을 꿈꾸고 있고, 하나는 삼개월의 인턴생활을 마치고 광고회사에 취직했다. 일년 만의 만남이라 반가울 것이다. 몇 마디 나누다 보면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사회는 경쟁의 세계다. 똑똑한 개인주의는 위험하다. 성과보다 승진이나 이직을 꿈꾸기 때문이다. 천둥소리에 놀라는 시늉으로 조조의 경계를 허문 유비의 우둔함의 지혜를 배워라. 단지 덕장이라서 사장이 되는 법은 없다. 그는 능력을 숨기고 나누어 성과를 드러낸 것이다. '자생이모위(子生而母危)' 라고 했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직장 생활 30년의 짬밥이라고 장광설이 되면 말 많은 꼰대로 전락해 교육효과도 낮고 내년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뭐 좀 깔끔한 게 없을까? 나는 문득 류시화님의 잠언 시집 속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 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저를 사려 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크나큰 지혜의 창고를 다 이용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저도 결국엔 친구가 몇 명 남아 있어야 하겠지요. 끝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으로 날아가는 날개를 주소서. 내 팔다리, 머리, 허리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예 입을 막아 주소서.

내 신체의 고통은 해마다 늘어나고 그것들에 대해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은 나날이 커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얘기를 기꺼이 들어줄 은혜야 어찌 바라겠습니까만 적어도 인내심을 갖고 참아 줄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제 기억력을 좋게 해주십사하고 감히 청할 순 없사오나 제게 겸손 된 마음을 주시어 제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과 부딪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들게 하소서.

나도 가끔 틀릴 수 있다는 영광된 가르침을 주소서. 적당히 착하게 해주소서. 저는 성인까지 되고 싶진 않습니다만.... 어떤 성인들은 더불어 살기가 너무 어려우니까요... 그렇더라도 심술궂은 늙은이는 그저 마귀의 자랑거리가 될 뿐입니다. 제가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저로 하여금 뜻하지 않은 곳에서 선한 것을 보고 뜻밖의 사람들에게서 좋은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을 주소서.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선뜻 말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소서'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그래, 힘들게 절벽을 오르는 그들에게 설교 따윈 집어 치우고 카톡으로 이거나 남겨주자.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 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 곧장 요점으로 날아가는 날개. 나도 가끔 틀릴 수 있다는 영광된 가르침. 뜻밖의 사람들에게서 좋은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 그들에게 그것을 선뜻 말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 천세형과 김민지는 감수성이 풍부한 친구들이니 알아채고 느낄 것이다. 그 수녀의 기도가 이 각박한 대한민국에서 살아남는 처세술이라는 것을. 참견은 금물이니 자신의 일에 집중해라. 두괄식으로 요약하고 보고해라.

수정하고 반성하는 것은 일 속에서 도를 닦는 일이다. 어느 구름에 비가 내릴지 모르니 누구든 환대해라. 승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아끼지 마라… 17세기의 어느 수녀의 기도가 21세기를 살아갈 그들에게 함박눈 같은 희망이 될 것이다. 시대가 바뀌더라도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본질이라고 부른다. 2019년에도 부디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당신도 나도. 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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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래 정보경영학박사, 트렌드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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