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와 춤을] 오브제 쁘띠 아를 찾아서

[광고와 춤을] 오브제 쁘띠 아를 찾아서

  • 황지영 칼럼리스트
  • 승인 2019.01.1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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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로(New-tro)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다. 옛 것이야말로 새것인 세대들의 특이한 소비식성 때문이다. 재미삼아 뉴트로 감성으로 2002년을 새롭게 구성해 보자. 정치, 문화적으로 어떤 사건들이 있었나? 부시대통령의 악의 축(軸) 발언,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강행, 5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월드컵 출전 48년 만의 첫 승 그리고 손기정선수의 사망 등.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도록 자극했다. 다수의 광고들도 그런 흐름에 편승하고 있었다.

2명의 남성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 팀버랜드 광고에서 제기되는 질문이다. 보도블럭을 따라 걷고 있는 남성은 거울로 된 벽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호수 주변을 걷고 있는 남성의 시선은 거울 밖을 향한다. 의상, 시선, 보행의 유사성 등은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울을 설정한다. 그러나 거울은 다른 차원을 비춘다. 일견 유사해 보이지만 보행자세, 얼굴 각도 등에 있어 두 남성은 차이를 지니며 각기 다른 공간에 속해 있다. 거울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거울이 반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다양한 대중문화텍스트, 문학, 예술작품 등에서 인용되는 라캉의 거울단계, 상상계, 상징계와 같은 은유적 장치들을 접해왔다. 팀버랜드 광고에서의 거울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

수직적인 건축물, 금속 프레임, 팀버랜드란 이름은 아버지를 은유하며 ‘상징계’를 지시한다. 반면 수평적인 대지, 호수, 갈대는 어머니를 은유하며 ‘상상계’를 지시한다. 그리고 좌측 상단의 명사 팀벌랜드, 우측 남성의 시선 그리고 텍스트 밖 우리(you)의 시선을 연결하면 3자적 관계를 내포하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구성된다. you란 호명은 그와 우리를 동시에 지시한다. 결국 그와 우리는 같은 운명공동체이다. 그는 곧 우리다.

잘려나간 남성의 얼굴 부위는 우리가 처한 딜레마를 해결한다. 그와 우리는 상상계와 상징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상상계에서 현존하기 위해 그는 상징계에서 부재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적어도 상상적으로 우리는 그의 욕망이자 우리의 욕망이기도 한 상실된 대상인 어머니를 회복할 수 있는 상상계로 되돌아 갈 수 있다.

광고에서는 목적어가 누락된 ‘seek out’라는 명령어가 수수께끼처럼 제시되어 있다. ‘캐나드 부츠와 함께라면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다’는 문장과 연결될 때 명령어는 ‘부재하는 캐나드부츠’를 지시한다. 상품담론 차원에서 미완의 문장은 ‘캐나드부츠를 찾아내라’는 문장으로 완성될 수 있다. 또한 상징계와 연결될 때 명령어는 ‘부재하는 어머니’를 지시한다. 따라서 주체담론 차원에서 ‘어머니를 찾아내라’는 새로운 문장이 구성될 수 있다. 상이한 담론의 연결은 ‘캐나드부츠=어머니’라는 등식을 만든다. 아버지의 개입과 명령은 어머니의 환유만을 약속한다. 상징계에 진입한 주체에게 어머니의 상실은 숙명이다. 캐나드부츠는 어머니의 환유적 기표로서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오브제 쁘띠 아’로 제시된다. 그리하여 캐나드부츠의 소비는 상징적 차원에서 존재의 빈틈을 메워준다.


황지영 경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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