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스탈린과 그 이후의 소련 광고. 1930-1960년대 (#2)

[신인섭 칼럼] 스탈린과 그 이후의 소련 광고. 1930-1960년대 (#2)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1.06.1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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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odaya Gvardina (문학잡지)를 읽으세요. 작가. Mayakovsky. 1924
Molodaya Gvardina (문학잡지)를 읽으세요. 작가. Mayakovsky. 1924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스탈린은 집권했다. 소련은 스탈린이 시작한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1929-1933)이 1년을 앞당긴 1932년 12월에 완료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성공적으로 완성한 제1차 5개년 계획의 결과 소련은 세계 5위의 공업국가에서 제2위로 올라섰다. 제1차 계획의 중점은 중공업으로, 재원의 86%가 중공업에 투입되고 목표를 103.4% 초과 달성했다. 경공업은 목표 대비 84.9%를 달성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볼셰비키가 함락시킬 수 없는 요새란 없다”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1932-1933년 기간에는 심한 기근으로 수백만이 아사하기도 했다. 또한 1933년에는 히틀러가 집권해서 소련에게는 눈에 안 보이는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1934-1938년의 제2차 5개년 계획도 중점은 중공업이었고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결과 강철 생산량은 독일에 접근했다. 이 기간에 스탈린의 종교 탄압이 강화되어 1932-1933년에는 러시아 정교 교회 폐쇄, 1933-1935년에는 성직자 제거가 있었다. 1, 2차 5개년계획이 12%~13%라는 고도 성장 결과 소련은 후진농업 국가에서 선진 공업국가로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30년대 중반에는 농업 생산의 증가로 1935년 10월부터 배급제도가 없어지고 자유화됐다. 이 해 11월에는 “생활이 좋아졌습니다. 동무들, 생활이 즐거워졌습니다”라는 스탈린의 유명한 말이  유행했다. 30년대 초에는 전국 유통 시설이 완성되어 외국인 상대 외화로 판매하던 토르그신 제도가 없어졌다. 그리고 토르그신 상점의 리모델링이 성행해서 새로운 상점에 대한 대대적인 장식이 붐을 이루고 인테리어 디자인 전문가가 등장했다. 아울러 각종 포스터도 등장했다. 이 운동은 “소비에트 상업광고의 승전 행군”이라 했다. 이 운동은 1940년 식품 위기까지 계속되었다. 30년대에는 소련 공산품 특히 기계와 각종 장비 수출이 확대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결과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한 광고가 활발해졌고 동시에 기업과 제품의 국내 판촉을 돕는 정부기구가 대두했는데 브네슈토테(Vneshtorgreklama)라는 대외 무역 광고국이라 할 기구가 통산성 산하에 탄생했다. 대외 무역 촉진을 위한 광고를 중심으로 광고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37년에 최초로 전국적 행사로 상업광고 콘테스트가 개최된 것이 그 예다.

1930년대 외국인 대상 광고를 취급하는 Torgsin의 영문광고. 소련 내의 친족이나 친구에게 싼 값으로 좋은 선물을 보내려면 Torgsin을 이용하라는 광고. 미국의 여러 도시에 제휴회사가 있음을 알리는 광고이다.
1930년대 외국인 대상 광고를 취급하는 Torgsin의 영문광고. 소련 내의 친족이나 친구에게 싼 값으로 좋은 선물을 보내려면 Torgsin을 이용하라는 광고. 미국의 여러 도시에 제휴회사가 있음을 알리는 광고이다.
30년대 소련제 각종 공산품 수출 광고
글라브흐라도프롬(냉동제품회사)이 만든 아이스크림 판매 광고. 1951

1939년에 시작한 제3차 5개년 계획은 3년 반으로 중단되었는데,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전시체제로 전환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자원은 전쟁 목적을 위해 동원되었다.

햇수로 5년에 걸친 2차 대전으로 소련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98,000개의 집단 농장이 파괴되고 137,000대의 트랙터와 49,000대의 콤바인 기계를 잃었다. 도시의 40% 주거시설이 파괴되었다. 철도 역시 40%를 잃었다. 750만명의 군인과 700만명의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 손실은 합계 2천만 명에 달했다. 1940년 전쟁 전에 대비하면 전력 수준은 52%, 강철 생산은 45%, 식품 생산은 60%로 줄었다. 게다가 1946년에는 1891년 이래 최악의 한발이 겹쳤다. 독일에서 받은 배상금과 위성국가를 독일로부터 해방시켜 준 댓가로 받은 재원으로 경제를 복구했다. 이 기간에는 1949년의 동유럽 위성국과 경제상호지원협의회인 코메콘(Comecon)이 체결되었다.

제4차 및 제5차 5개년 경제발전계획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서 1955년 기간으로 이 때 내세운 슬로건은 1960년에 소련이 선진공업국이 된다는 것이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으로 그의 20여년 독재가 끝나고 후루시초프 시대가 개막했다.

그런데 1950-1955년의 5차 5개년 경제발전 계획 다음의 1956-1958년 제6차 5개년 계획은 3년만이 폐기했는데 터무니 없는 계획 목표 때문이었다. 7차 5개년 계획은 1959년에서 1965년 기간 7년이었다. 8차는 1966년에서 1970년, 그리고 9차인 1970년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때 슬로건이 1970년대에는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것이었다. 비로서 국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소비재 생산 5개년 계획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리고 ‘60년대 후반에는 레클라마라는 광고 전문지가 발행되었다.

1960년대 전반의 각종 광고. 커피, 보드카, 와인 및 모두에게 좋은 우유 광고
1960년대 란제리, 스포츠, 부츠, 와이서츠 등 각종 소비재 광고
1960년대 후반의 스타킹 광고
1960년대 후반의 스타킹 광고
1960년대 후반의 각종 치즈 광고
1960년대 말의 자동차(갈매기 표) 및 1970년대 택시, 여성 매니큐어, 남성 구두 광고

공식 소비에트 교리에 나와 있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이론에 따르면 서구의(자유경제체제)광고란 현대 자본주의 제도의 착취 장치의 일부이다.

그런데 1929년에 제1차에서 1966년-1970년의 제8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이르는 40여년 기간의 소련 경제에는 정부 유통관련 조직 예산에 나와 있는 1966년과 1967년 통상광고(Trade Advertising) 금액은 2천 770만 루블 및 5천 300만 루불이다. 물론 이 밖에도 광고비는 있다. 즉 공산주의 교리와는 달리 소련에서도 상당한 광고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중매체 광고가 극히 적은 것은 알려진 사실이지만 광고의 일부인 소련 포스터 역사에는 활발한 광고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4년 제3호 레클라마(광고) 잡지. 표지. ‘60년대에 창간해서 1980년대까지 출판
1974년 제3호 레클라마(광고) 잡지 표지. ‘60년대에 창간해서 1980년대까지 출판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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