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수박껍질과 미군 포로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수박껍질과 미군 포로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1.07.12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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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픽사베이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 이제 갓 열 살을 넘긴 소년에게 전쟁은 또 다른 놀잇거리를 주었다. 1950년 여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 조금 지난 서울에 미군기의 폭격이 있다 싶으면, 어머니의 성화에 잠시 몸을 피했지만, 잠잠해졌다 싶으면 폭탄이 떨어진 장소로 달려갔다. 운 좋으면 폭탄 조각이나 탄피 같은 걸 구해서 장난감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청파동 근처에 살았으니, 서울역 광장도 지척이었고, 육군본부가 있던 삼각지와 멀리 뛰면 폭파된 한강교까지도 노는 무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군 포로들이 온다고 해서 구경하러 남대문 쪽으로 갔다. 한여름에 며칠째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고, 때투성이로 옷차림이나 사람이나 너덜거리는 키 큰 미군들이 줄을 맞추는 둥 마는 둥 대열 양쪽에서 인민군들이 총을 들고 느슨하게 감시하고 있는 가운데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오산과 대전에서 인민군들이 미군을 상대로 승리를 했다고 하더니, 거기서 잡힌 미군들 같았다. 길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욕을 퍼부었다. 아이도 친구들과 함께 미군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돌도 던지고 그들에게 닿지도 않았지만 침도 뱉었다. 그런데 한 미군이 일순 멈춰 서더니 몸을 숙였다. 무엇을 하려는가 궁금해서 물끄러미 봤더니, 그 미군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박 껍질을 주워서 입으로 가져가 오물오물 씹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적군이고 뭐고를 떠나 인간이 불쌍해서 돌을 던지거나 욕을 할 수가 없었다.

측은지심이란 단어는 몰랐어도, 그 실체를 깨닫고 자신 속에 담았던 그 소년은 내 장인어른이시다. 근 십 년 전에 위에 쓴 일화를 말씀해 주셨다. 장모님께서도 처음 들으신다며, “아니 당신은 그런 중요한 역사적 증언을 왜 이제야 하는 거요?”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가볍게 타박을 하셨다. 주린 배에 남루하기 그지없는 차림새에, 포로 신세로 자신의 운명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상태로, 문자 그대로 이역만리 자신과 다른 인종들의 장난감처럼 되어 푹푹 찌는 더위 속에 걸음을 옮기다가, 자신에게 침을 뱉고 욕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언제 버렸는지도 모르는 수박껍질을 줍는 미군 포로의 모습이 그려지며 내 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수박껍질을 씹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모습을 보고 돌아섰던 소년의 실루엣이 한쪽에 같이 자리 잡았다.

나의 장인어른은 1940년생으로 해주에서 해방을 맞이하셨다. 그 부친, 곧 나의 처할아버지께서 해운 관련한 일을 하셨다. 해방되었다고 사람들이 좋아했던 모습보다, 소련군(러시아군)이 해주에 들어왔던 기억이 선연했다. 만다섯이 갓 넘은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기억할 수 있었을까 싶었지만, 일본군을 포함한 그때까지 보던 사람들과는 다른 인종이었으니 그 어린 나이였지만 강하게 자국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대한해운공사가 최초의 국영기업으로 1949년에 설립되어 남대문에 사무실을 두면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서울 수복’ 이후 풍경은 별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후는 인천에서 겨우 구한 쪽배로 갓난아기까지 포함된 대가족이 풍랑을 겪으며 며칠에 걸쳐 목포까지 내려오는 이야기로 이어지곤 했다.

전광용이 1962년 <사상계> 잡지에 발표한 <꺼삐딴 리>라는 소설은 고교 교과서에도 일부 실리고,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 소련, 미국으로 충성 대상을 바꾸며 살아가는 기회주의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담하게 그린 소설이다. 세 가지 상징물이 주인공인 이인국 박사가 충성의 대상을 바꾸며, 기회를 엿보고 잡으려 기를 쓰며 살아온 시대를 표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국어상용의 가(國語常用의 家)’라는 액자, 소련군 장교의 얼굴에 난 ‘혹’, 미국 대사에게 바치려 준비한 ‘고려청자’. 반전을 담은 각각의 함의는 더 깊이파고 들어야 한다.

열 살 남짓한 어린이에게는 속물적 기회주의의 상징물들과는 다른 길바닥 수박껍질이 눈에 담겼다. 그리고 그를 주워 먹는 사람에 대한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본연의 감정이 실린다. 내 출세나 영리 영달을 위한 기회주의가 자리 잡을 여지는 없다. 이런 시대의 단편 삽화들을 육성으로 전해 주실 수 있는 분들이 사라지고 있다. 자연스러우나 안타까운 일이다.

7월 8일 별세하신 장인어른의 상을 마치고 와서, 추모하며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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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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