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당사자가 빠진 한국전 휴전협정의 풍경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당사자가 빠진 한국전 휴전협정의 풍경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1.07.26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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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협정 조인식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 1953년 7월 27일 한국전 당사자들이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1950년 6월 25일에 북한군이 38선 일대에서 전면적으로 기습하며 시작된 전쟁을 잠시 그만두자는 휴전에 합의한 날이 7월 27일로, 예전에는 방송에서 특별 프로그램도 했는데, 이번에는 올림픽, 코로나19에, 무더위에 묻혀 지나갈 것 같다. 다른 한 편으로 한국에서 휴전협정을 가지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공식 정전협정 문서에는 자신의 땅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수많은 희생자를 낸 한국, 곧 남한 대표의 서명은 없다. 우리 국가기록원의 웹사이트에 ‘한국전쟁 휴전협정문’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국가기록원이 보존하고 있는 휴전협정문은 영문으로 작성된 총 36쪽 분량의 사본으로 1953년 8월 31일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접수한 문서이다.

휴전협정문의 정식 명칭은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대한민국은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중국군 철수, 북한의 무장해제,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 등을 내세우며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기록원의 설명은 ‘미필적 고의’의 인상이 짙게 한국의 서명이 없는 이유를 가린 구석이 있다. 협정문에 보면 정전 조건과 규정들의 의도를 ‘순전히 군사적 성질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오직 한국에서의 교전 쌍방에만 적용한다’라고 했는데,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이 당시의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에 있기 때문에 협정의 당사자가 될 수 없었다. 

정전협정문
정전협정문

실제 협정 조인의 현장에서도 한국은 철저하게 배제된 당사자라는 반전이 있다. 당시 조인식에 참석한 최병우 기자의 현장 스케치 일부이다.

학교 강당 크기만한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 것은 오직 둘뿐이었다(나머지 3명은 조인장 밖 취재만 허용). 유엔 측 기자만 해도 약 1백 명이 되고 참전하지도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개가 넘는데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군 장교는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1951년부터 진행된 휴전을 위한 회담에 한국군 장교가 미군과 함께 한쪽 대표단의 일원으로 계속 참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휴전반대운동’의 일환으로 서명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되기는 한다. 당시의 휴전 반대는 격하게 벌어졌다. 거의 3만 명에 이르는 포로들을 한국군 일부를 동원하여 탈출시킨 우리가 ‘반공포로 석방’이라고 배웠던 사건은 미군에 위임한 전시작전권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였다. 대한민국의 민심으로 일반 시민, 특히 중고교 학생들을 동원한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한국 측에 휴전 반대 움직임을 자제하라며 방한한 미국의 특사단과 그들을 취재하는 외신 기자들이 반대 시위의 전략적 주요 관객이었다. 현장 모습을 전한 어느 미국인의 기록이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잠자코 중앙청 앞을 지나 거기서 얼마 안 떨어져 있는 유엔군 기자단 숙소인 내자호텔을 향해 행진하였다. 학생들은 그 호텔 앞 지저분한 교차점에 와서 발을 멈추더니 호각 소리의 신호와 함께 흙탕물 속에 주저앉아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는 놀라운 군중심리의 효과를 나타내면서 점점 더 커져 갔고, 이렇게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얼마 안 되던 눈물방울이 조금 있으니까 통곡으로 변해 모든 학생 뺨에서는 굵은 눈물 줄기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위를 해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미국 특사단에 휴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향후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 체결, 1천만 달러에 달하는 식료품과 2억 달러의 경제 원조, 정기적 한미 고위 회담, 한국군 증강 지원 등의 약속을 받았다고 한다. 

북진통일국민총궐기대회
북진통일국민총궐기대회 (출처 위키피디아)

협상 방식이라고 했을지는 몰라도, 겉으로는 계속 북진통일을 외친 한국군에게 북한군과 중공군이 일주일에 걸쳐서 맹공을 퍼부었다. 그 기간 동안 1만 4천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현실적으로 한국이 자신들의 주장에 맞춰 단독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어쩌면 정전협정 조인식에 참가하지 않고, 서명을 남기지도 않았다는 게 자존심을 실질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는 전쟁 전체도 그랬지만, 그 짧은 격렬하게 반대하는 시기에 치러야 했던 희생이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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