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래의 트렌드라이팅] 타자와 선생(先生)

[김시래의 트렌드라이팅] 타자와 선생(先生)

  • 김시래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9.09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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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살아가다보면 신심과 정성을 다했는데도 자신의 진의를 몰라주는 상대와 마주할 때가 있다. 한때 존경했던 그분과의 경우도 그랬다. 어렵사리 합류를 결심하고 날짜만 기다리던 내게 갑자기 광고주 불만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한 이견과 근태문제까지 거론하며 함께하기 어렵다는 통보를 단문의 메일로 전해왔다. 내 이직으로 이익을 침해당할 것을 우려한 훼방꾼의 농간이였다. 해남의 땅끝마을을 걸으며 인생의 쓴맛을 달랬다. 인생의 묘미는 내리막 다음의 오르막이다. 제일기획 사장까지 지내신 대선배의 보증으로 친정집 제일기획으로 다시 돌아와 십수년간 많은 캠페인을 성공시키며 대한민국 광고대상을 받고 최우수마스터와 신지식인의 자리까지 오르고 그 경력을 발판으로 광고회사의 대표까지 지냈으니 말이다. 반면 내게 냉정하게 문을 닫아 걸었던 그 회사는 얼마안가 부도를 맞고 주인마저 바뀌었으니 운좋게 화를 피해간 셈이었다. 하지만 시린 내상은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서로의 편협이 서로의 인연을 가로막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탓할일도 아니다. 인연의 끈은 사람들을 맺어주기도 하지만 갈라서게도 만드는 법이니까. 

인연이 소중한 자산이 되고 승부의 분수령이 되는 곳은 뭐니해도 정치판이다. 하지만 지금 대선경쟁은 인간 세상의 작동 원리를 깡그리 잊은 듯하다. 수십명이 우르르 몰려나와 무주공산이 된 성곽의 주인이 되겠다며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살벌한 전선을 펼치고 있다. 공정과 실용으로 나라를 책임지겠다는 사람들이 호위무사를 대동하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장수처럼 살기가 넘친다. 기만적이고 유치한 언사는 딱할 정도이고 금도를 넘었다며 책임을 떠넘기는 작태는 가증스럽다. 내 점수올리기보다 상대의 약점을 물어뜯어 페널티점수를 얻겠다는 심뽀다. 너나없이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산다고 작심한 듯하다. 정책이 아니라 검증에만 매달려 후보자의 과거를 볼모로 유권자의 미래가 포박당하고있다.

최근 개봉한 일본영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남편이 죽고 홀로 삶을 살아가는 미망인의 이야기다. 그녀는 매일 아침 일어나 빵과 계란후라이로 아침을 먹은 뒤 동네 병원에 들리고, 도서관에 가서 고대 생물 책을 읽으며 반복되는 일상을 산다. 딸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연락하고, 아들과는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그녀가 어두운 방에서 홀로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할 때 고향 사투리로 ‘내는 니다’라고 말을 걸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이들은 쓸쓸하지만 자유로운 삶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애써 위안삼는 주인공의 내면이다. 특별할 것없는 그녀의 남은 나날들이 그녀의 뜻대로 흘러갈 것이란 기대는 타인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이 확인되며 부터다. 그녀는 탁구를 함께 쳐보지 않겠냐는 도서관 사서에게 허락의 뜻을 전하고 갑자기 들른 손녀의 인형을 바라보다 낡아버린 옷을 새 옷으로 갈아줘야겠다고 말한다. 외로움과 싸워나가며 무덤덤하게 내면에 갇혀있던 자아가 타자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홀로서기는 타인과 따스한 관계맺기로 시작한다. 

"작은 기쁨들은 이제 큰 빛이 되어 나의 내면을 밝히고 커다란 강물이 되어 내 혼을 적시네 내 일생동안 작은 기쁨이 지어준 비단 옷을 차려입고  어디든지 가고 싶어, 누구라도 만나고 싶어, 고맙다고 말하면서 즐겁다고 말하면서" (작은 기쁨/이해인)  시인은 타인은 우리의 내면을 밝히는 작은 기쁨이자 자신을 바꾸는 계기라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앞을 가늠할수없는 많은 인연을 만난다. 2차세계대전 당시 가스실에 까지 끌려갔으면서도 윤리적 인간을 강조한 레비나스는 타자를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이지만 그렇기에 타자야말로 내게 깨달음을 주는 존재라고 했다. 자기의 기준을 강요하지말고 타자의 필요에 맞춰주는 "무한성"의 정신을 강조했다. 공자도 서(恕)의 개념을 통해 자신이 하고싶지 않은 일을 상대에게 시키지말라고 했다.  장자에서 나오는 노나라 임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융숭한 대접을 한답시고 새를 인간과 똑같이 대접하다가 사흘 만에 죽었으니 그것은 새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독단을 경계하고 성심을 다해 타인을 존중하라고 했다. 상대가 다가서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벽같은 존재라면 오히려 과정의 깨달음과 소통의 결실은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내가 니다'를 외치는 영화속 장면처럼 우리는 연결되어있다. 타인은 자신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통로다. 당신 앞에 나타난 타인이 선생인 것이다. 우리 모두의 운명을 보듬겠다는 분들도 살타(殺他)보다 아생(我生)의 정공법으로 그들의 한치앞에 불안하게 놓여진 자신의 인연과 업보도 돌보시라고 전하고 싶다.

 


김시래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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