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최의 생각유람] ⑥ 어처구니의 트렌드

[피카최의 생각유람] ⑥ 어처구니의 트렌드

  • 최창원
  • 승인 2019.05.29 1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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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는 짧지만, 어처구니 있는 좋은 캠페인은 생명이 길다.

‘어처구니없다’는 말이 있다. 너무나 엄청나거나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다, 라고 사전은 그 의미를 적고 있다. 원래 ‘어처구니’는 궁궐 건물의 처마에 올렸던 동물 모양의 토우로, 기와를 고정시키면서 궁궐 수호의 책무까지 담당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걸 깜박하고 올리지 않았을 때의 황당한 상황을 표현했던 그 말이 일상의 언어로 된 것. 영화 <베테랑>을 통해 유행했던 ‘어이가 없네’와 일맥상통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광고 중에 이런 광고가 있다. 샵 재팬(Shop Japan)의 원더 코어(Wonder Core)라는, 허리와 등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기구 광고. 중년남성이 일상에서 살벌하게 넘어지다가 벌떡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 모습이 여러 상황으로 이어진다. 물론 앉을 땐, 어느새 제품이 주인공을 받쳐주고 있고, 매 상황마다 ‘넘어지는 것만으로도 복근이! 원더코어’라는 카피가 반복된다. 한 마디로 황당한 광고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제품만 다를 뿐 이 광고와 거의 흡사한 형식을 취한 광고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크리에이티브를 요구받기도 한다. 노골적인 B급 정서에, 5초 간격으로 브랜드를 반복 노출시키는 아이디어. 황당하다, 어이없다, 말이 안 된다, 하는 욕이나 야유를 감수하더라도, 재미로 시선을 화끈하게 붙잡으면서, 시도 때도 없는 스킵(skip)을 이겨내는 확실한 파격. 한숨부터 나오지만, 유튜브와 바이럴 광고시대가 요구하는 그 방향을 때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지붕 위를 달려야 때, 나는 어처구니 있는 광고를 떠올리며 내 크리에이티브의 길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이를테면, 라코스테(Lacoste)의 광고 캠페인 같은 것. 최근에,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노래를 배경으로, 집이 갈라지고 무너질 정도로 격렬하게 싸우는 커플의 새로운 시리즈가 나와서 다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지만, 나는 이 캠페인의 원조 격인 ‘대도약(The Big Leap)’편을 좋아한다.

사랑을 시작하는 남녀 커플. 머뭇거리며 손을 잡고 눈치를 보며 마침내 첫 키스에 성공 하는 감격적인 순간. 그 순간의 심적인 상태를 빌딩 옥상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인생 스포츠로 상징화해낸 엄청난 크리에이티브. 그 비주얼을 더 울렁거리게 하는 디스클로즈(Disclosure)의 음악. 그리고 자막으로 조용히 마무리 되는 카피, ‘Life is a Beautiful Sport’.

광고에 파격은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크리에이터들은 고민한다. 그러나 그 파격이 어처구니없는 것까지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광고는 마케팅의 한 부분인 동시에, 크리에이티브의 영역이기도 하니까. ‘크리에이티브’라는 단어가 가진 그 ‘창의성’ 속에는 동시대의 문화와 예술, 세상을 앞서 열어가는 정신의 높은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하니까.

광고는 짧지만, 좋은 캠페인은 생명이 길다. 다시, 그런 어처구니가 있는 광고 캠페인이 트렌드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최창원 카피라이터, 겸임교수, 작가, https://www.facebook.com/ccw7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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