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언제부터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었을까?

[신인섭 칼럼]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언제부터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었을까?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0.12.23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매드타임스 신인섭 대기자 ]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씰이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88년 전인 1932년이었다. 첫선을 보인 곳은 해주에 있는 구세요양원(救世療養院). 해주는 지금 북한의 황해남도 도청 소재지이고, 해방 전에는 황해도 도청이 있던 곳이다. 시작한 사람은 캐나다의 의료 선교사 셔우드 홀 (Dr. Sherwood Hall). 1893년 평양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홀은 나이 30세 되던 1922년에 결핵 환자 치료를 위해 해주요양원으로 부임했다.

크리스마스 씰은 이미 덴마크에서 시작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퍼져 있었다. 지금도 폐병은 두려운 병이지만,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스트렙토마이신이 발명된 이후에야 치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약이 나오기 전에는, 특히 어린이에게는 폐병은 매우 심각한 병이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씰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아이나 홀벨(Einar Holboll)이란 우체국 서기였다. 그는 크리스마스 때에 별도의 씰을 만들어 팔면 수입이 생길 것이고, 폐병 앓는 어린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이디어가 덴마크 체신장관과 여왕의 승인을 받아 씰이 시작했다. 그래서 Julen (크리스마스)란 말과 씰의 그림은 여왕의 모습을 담았다.

셔우드 홀(좌)과  최초의 씰
셔우드 홀(좌)과 최초의 씰

1904년에 덴마크에서 시작된 씰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07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작된지 28년 후인 1932년, 캐나다 의료 선교사가 시작했다. 처음 씰 디자인은 한국 사람이 잘 알고 있으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거북선을 모델로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당국은 이것이 반일 감정을 상기시킨다는 이유로 기각하고, 그림은 남대문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 거북선 모양의 디자인은 지금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 참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사상 무장을 위해 모든 국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미션계열 교육 기관에도 이를 강요했으나, 선교사들은 항의했고 학교 문을 닫게 되었으며 일본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씰은 1940년에 끝났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운동에는 재미있는 일화들이 있다. 1937-38년 씰의 그림은 평양 대동문을 배경으로 동강 얼음판 위에서 팽이놀이를 하는 어린이와 학생, 그리고 애를 업고있는 소녀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유명한 화가 김기창(金基昶)의 것이다.

1940-41년의 그림에는 금강산이 배경으로 되었으나, 허가를 받지 못하고 대문 그림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인즉 당시 전시체제 하에서 20m 이상 높이의 산은 사진이나 그림에 쓸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금강산을 그린 씰은 모두 압수되고 홀 선교사는 간첩 행위 죄로 추방되어 인도로 갔다.

해주 요양병원과 크리스마스 씰에 관한 또다른 일화는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관련된 것이다. 홀 박사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에 결핵 걸린 한국 소녀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대통령은 완쾌를 바란다는 카드을 보냈다 한다. 그리고 그 소녀는 뒤에 병이 완쾌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크리스마스 씰 운동이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1940-41년 씰을 마지막으로 이 운동이 끝났다가, 다시 해방 이후에 부활했다.

유한양행이 크리스마스 씰 운동을 위해 영자 일간지 "SeouL Press"에 게재한 광고

신인섭 (전)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