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래퍼 곡선의 진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래퍼 곡선의 진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1.04.26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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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 국가 최고위직 선거에 나선 후보들에게 세금은 양날의 검과 같은 공약 항목이다. 대부분의 경우 집권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쉽다. 표를 위하여 세율을 인하하겠다고 얘기는 했는데, 막상 나라를 운영하려다 보니 돈이 모자라는 경우가 닥치기 마련이다. 자금을 보충하려면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빚을 지든지, 세금을 올려야 한다.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를 꺾고, 이어 1984년에 재선까지 성공해 8년을 꽉 채워 집권한 레이건은 세금을 내리고 빚을 지는 길을 택했다. 레이건 정부에서 부통령을 하다가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아버지 부시는 딜레마에 빠졌다. 재정 적자가 너무 심각해져서 더 이상 빚을 끌어당길 수는 없었다. 세금을 올려야 하는데 선거 캠페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똑똑히 말합니다, ‘새겨 들으세요’, ‘내 말을 믿어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Read my lips”를 크게 외치며 증세는 없을 것이라 천명한 게 발목을 계속 잡았다. 결국 세금을 올리면서, 전당대회 그의 발언 장면이 다음 대선 캠페인 기간 내내 계속 TV 화면을 장식했다. 결국 그는 걸프전 승리를 이끈 현직 대통령이라는 프리미엄에도 불구하고 빌 클린턴에게 패했다. 참고로 지난 40년 미국 대선에서 현직 대통령이 패한 경우가 딱 두 번인데, 아버지 부시와 트럼프의 두 명 모두 공교롭게 공화당 출신이었다.

정권 차원에서 세금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특히 고율 세금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그래프가 있다. 바로 ‘래퍼 곡선(Laffer Curve)’이라는 것이다. 뒤집은 알파벳 U자처럼 생긴 이 곡선이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소득세율이 높아지면 국가의 세수도 증가하다가, 일정 선을 넘으면 줄어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벌어 봤자 세금으로 다낸다’라고 불평하며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래퍼 곡선 냅킨 (출처 미국사 박물관)
래퍼 곡선 냅킨 (출처 미국사 박물관)

1974년에 미국의 젊은 경제학자 아트 래퍼가 당시 미국 대통령 비서실을 책임지고 있던 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이 둘은 21세기 아들 부시 시대에 부통령과 국방장관으로 2차 걸프전의 주역이 된다-와 워싱턴DC의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으며 냅킨에 곡선을 그리며 세수와 세율 설명을 했다고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논설위원이었던 주드 와니스키가 1978년에 낸 저서에 레스토랑 안에서 벌어진 일들의 생생한 장면 묘사와 함께 래퍼 곡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2005년 와니스키가 죽은 뒤에, 그의 부인이 유물을 정리하다가 래퍼 곡선이 그려진 냅킨을 발견하고는 그걸 기증하여, 현재 냅킨은 국립 미국사 박물관에 소장이 되어 있다고 한다. 얼마나 멋진 스토리인가. 젊은 경제학자가 최고위층 백안관 인사들에게 급하게 그러나 절절이 알리고 싶은 마음에 고급 레스토랑의 냅킨에 그래프를 그려 충고를 한다. 경제학이나 수학이라면 질색하는 이들도 알아보기 쉽게 그래프는 단순하다. 거기에 시각적 효과까지 증거하는 냅킨까지 실물로 있다니. 그런데 래퍼 자신이 반전을 일으킨다. 래퍼 곡선에 관한 시초부터 이후의 영향 등을 기술한 기록에서 이렇게 썼다고 한다.

"와니스키가 쓴 내 일화에 관한 유일한 의문은, 그 레스토랑에서는 천으로 된 냅킨만 사용하며 우리 어머니는 내게 좋은 물건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뭐, 어쨌든 나에 관한 이야기니까 진짜 그런 척 해야겠다." <내러티브 경제학> (로버트 쉴러 지음, 박슬라 옮김, RHK 펴냄, 2021) 91쪽

한국에서도 세금이 화제이 오르면 누군가는 래퍼 곡선을 들먹인다. 세금 감면이 생산 증대와 국가 세수도 끌어올린다는 주장에 이용하는 무리들이 나타난다. 래퍼 곡선의 진정한 반전은 따로 있다. 아무도 국가 세수가 감소하기 시작하는 지점을 예측하지도, 그리고 현실적으로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혹시나 세수가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세율이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곡선 모양이 엎어진 U자이니 같은 세수가 두 개의 세율로 가능하다. 그런데 어느 쪽의 세율이 적용되고 있는지 판단하기 힘들다. 추이를 본다고 하지만 그게 꼭 세율의 영향을 바로 위에 얘기한 대로 콕 집어서 규정하는 건 시각에 따라 확확 바뀔 수 있다.

그렇게 어려운 건 크게 신뢰가 가지 않더라도 경제학자들에게 맡기자. 이 지면에서 래퍼 곡선은 출연 인사들과 고급 레스토랑이라는 배경, 냅킨이라는 소품이 어우러져 나온 멋진 스토리텔링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으로만 기억하면 좋겠다. 래퍼가 나올 때 꼭 언급되는 낙수효과 따위는 잊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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