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미가 되어라!

가자미가 되어라!

  • 이승재
  • 승인 2021.06.23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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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내가 이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슬램덩크』의 주장 채치수는 전국 최고의 선수 신현철과의 대결에서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월등한 기량 차이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당황뿐입니다. 

본인의 모든 동작을 간파하고 있는 상대 앞에서 자꾸만 무리수를 남발하다 결국 쓰러집니다.

채치수의 머릿속에는 아득한 어둠뿐입니다. 

이때, 경기장에 한 요리사가 난입하여 쓰러져 있는 채치수의 머리 위로 무를 돌려 깎으며(?) 이런 말을 전합니다.

“화려한 기술을 가진 신현철은 도미, 너는 가자미다.” “진흙투성이가 되어라..!”

요리사의 이 비유적 한 마디는 채치수에게 큰 깨달음을 전달합니다. 

팀의 기둥이었던 채치수는 자신이 신현철을 넘지 못하면 팀이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인정하며 관점을 바꿉니다. 본인이 패배해도 다른 팀원들의 장기를 살려줄 수 있다면 팀은 승리할 수 있다고요. 이후 그는 슛이 아닌, 패스와 궂은 일을 담당하며 경기의 분위기를 바꾸었고 승리에 한 발 다가갔습니다.

 

EP.2 막막한 항해를 하고 싶지 않아요.

최근 한 게임회사의 경쟁 PT에 초대받았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게임의 후속작 출시에 관한 광고로 잘 진행한다면 회사에 좋은 포트폴리오가 될 수 있겠다 싶어 고민 끝에 참여를 결정했습니다. 이후 클라이언트로부터 제안요청서(RFP)가 도착하였는데 그 내용이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제안 요청 사항 

  • 바이럴 될 수 있는 영상
  • 오직 크리에이티브의 참신성
  • 의외성과 화제성
  • 게임하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가 아닌, 일반 사람들도 재밌게 볼 수 
  • 있도록 타깃과 내용이 코어하지 않은 광고
  • 셀럽이 중심이 되지 않는 광고 
  • 예산 제한 없음

쉽게 보면 전략이나 메시지 개발보단 ‘바이럴 될 수 있는 재밌는 광고로 제안하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광고회사에게 이런 요청사항이 어려운 이유는 경쟁 PT이기 때문입니다. 참여 회사마다 3~4개 정도의 아이디어를 제안한다고 하면 광고주는 ‘단순 재미’ 위주로 구성된 열댓 개의 광고안을 두고 개인적인 취향 및 유머 코드에 따라 결정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업계에서는 통칭 ‘안 따먹기 PT’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경험상 이런 안 따먹기 PT에는 떨어져도 왜 떨어졌는지 명확한 피드백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도 불확실하고요.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끝내주는 아이디어로 뭔가 보여주겠어!”라고 마음먹고, 팀원들과 의기투합하며 첫 회의를 진행해보았지만 역시나 얼마 못 가서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각자 생각해온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공유했지만, 저마다 유머 취향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여 좀처럼 생각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팀을 이끄는 리더로서 어떤 기준으로 아이디어를 판단하고 정리해 나가야 할지 제시하지 못하자 모두의 답답함이 길어지더군요. 

이때 한 선배가 조용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어 들려주었습니다. 선배는 과거 국내 대기업 계열 광고회사에서 근무했었는데, 당시에 무척 중요한 PT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형 회의실에 주요 임원들부터 본부장 및 CD 등 약 20명이 모여 블록버스터급 회의를 하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황당했다는 겁니다.

클라이언트 측 결정권자가 고려대를 나왔는지, 연세대를 나왔는지, 연세대를 나왔으면 모델로 연예인 A씨를 선호하는 경향이 많고 고려대를 나왔다면 또 다른 연예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강아지를 좋아하는지 고양이를 좋아하는지 등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을 그 대형 회사의 중역들이 침을 튀겨가며 몇 시간 동안 논의하는 모습을 보며 당시에는 너무 큰 자괴감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이런 식의 회의가 몇 차례 반복되었고, 때마다 회의실 구석에 앉아 영혼 없이 버텨내는 시간들이 마치 골방에서 시들어가는 화초가 된 것처럼 싫었다고 합니다. 과거 본인이 꿈꿨던 광고회사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던 거지요. 이후 선배는 한동안 광고계를 떠나기도 했었는데, 시간이 제법 지나고 본인이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는 일들이 늘어나면서부터 그 당시 그 분들이 왜 그런 회의를 해야만 했는지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체면보단 어떻게든 이겨야만 하는 생존 싸움. 어떤 기준이라도 잡을 수만 있다면 치열하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 막막한 항해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 과연 이 모습들을 지금도 그때처럼 바라볼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선배의 이야기를 듣자 마치 수박 가운데가 쩍하고 갈라지는 것처럼 막혀있던 머리가 시원하게 열리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회의 중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저에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준 선배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져서 눈물 나도록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제안의 세부 기준들을 세워나가며 막막한 회의의 바다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앞선 선배의 이야기처럼 광고주의 프로필과 취향을 분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이럴을 원하는 클라이언트의 니즈에 맞춰 유튜브 전체 콘텐츠 중 조회수가 높은 영상들의 공통점을 찾아 필승 공식으로 정리하며 한 라인을 만든다던가, 아이디엇을 초대해줬다는 것은 우리의 작업을 좋게 봐주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아이디엇스러운 아이디어를 한 라인으로 구성하는 등 우리만의 기준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위와 같은 기준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멋져 보이지 않을 수도, 클라이언트의 입장에서 원하지 않는 방향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맞이하게 되는 막연한 바다에서 방황하지 않고 동료들을 이끌어 나가려면 어떻게든 기준을 세우고, 그 방향이 답이 되도록 달려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설령 그것이 진흙투성이가 되는 일일지라도 기꺼이! 

 

 


이승재 아이디엇 대표

※ 본 에세이는 한국광고총연합회 발간 <광고계동향> 5/6월호의 칼럼을 전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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