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고 맥락 사회의 거시기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고 맥락 사회의 거시기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4.02.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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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몇 년 전에 모 방송사의 예능 PD를 하는 후배와 만나서 그가 만든 프로그램 칭찬을 하며 말했다.

“네가 하는 ‘이구동성’ 프로그램을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어.”

후배가 고맙다고 하는데, 옆에 있던 다른 후배가 끼어들었다.

“형, 그 프로는 ‘이구동성’이 아니라 ‘동상이몽’이에요.”

PD 후배가 말했다.

“나는 그냥 ‘동상이몽’ 말씀하시는 걸로 알아들었어요.”

잘못 말해도 찰떡같이 바르게 알아듣고 반응해 주고, 틀린 걸 바로 지적하고 고쳐주는 후배 모두 고마웠다. 사실 이상하게 말해도 듣는 이가 알아서 제대로 이해해 주는 경우가 많다. 택시 기사에게 ‘예술의 전당’을 가자는 걸 ‘전설의 고향’이라고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데려다 줬다는 정말 전설 같은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친구들에게 직접 들은 사례도 수없이 이어진다. ‘빛 좋은 개살구’를 ‘빛 좋은 게맛살’이라고 하며 주부들과의 대화를 이어간 친구도 있고, 한 친구의 어머니는 농심 ‘너구리’를 ‘두더지’라고 하며 끓여 주셨는데, 친구는 아무 말 않고 고맙게 먹었다고 한다.

위의 경우에서 실제 말로 한 표현이 틀리고 맞고를 떠나서 상대방은 어떤 맥락에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정확하게 알아챈다. 굳이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상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는 경향이 큰 사회나 그런 환경을 ‘고 맥락(high context) 사회/문화’라고 한다. 대체로 한국, 일본이 대표로 동양이 서구에 비하여 그런 경향이 심하다고 한다.

2차대전 때 어느 일본 주부가 담담하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로 치면 통장 같은 이가 전해주는 자식의 전사 통지를 받는 장면을 그린 기록을 본 적이 있다. 날씨나 음식 등 얘기를 주고받다가 통지서를 전해줘서 고맙다며 돌아서는데, 통지서를 쥔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보고 그 주부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느꼈다고 통장이 회고한다. 진짜 속내와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표정의 차이를 뜻하는 일본의 혼네나 다테마에 같은 것도 고 맥락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고 맥락 성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시기’란 표현을 얘기한다. 농담조로 ‘거시기해서 거시기하면 거시기하는 것 아녀’ 정도로 얘기해도 대략 무언지 감을 잡지 않는가. <아마존의 눈물>이란 다큐멘터리를 만든 제작진이 그곳의 조에 족이란 부족은 ‘게또’라는 한 마디로 여러 의미를 담아 의사소통을 한다는 얘기를 해서 화제가 되었다. 아래와 같은 식이다.

(담은 의미: 친구야 내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으니 나 대신 네가 오늘 사냥을 나가줄래?)

(실제 한 말)게또 ?? ”

(대답에 담은 의미: 그래 친구야 나도 오늘 좀 피곤하고 하지만, 네가 부탁하니 내가 나가줄게)

(실제 한 말)게또 !! ”

한국에서 그런 고 맥락 문화를 직접 활용한 유명 광고가 있다. 오리온 초코파이에서 1989년에 처음 선을 보이고, 20년 넘게 활용했던 CM송과 그에 어울린 영상들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

그냥 바라보면, 음”

너무 오래 쓰다 보니 좀 변화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2012년에 오리온 초코파이에서는 ‘정(情)때문에 못 한 말 까놓고 말하자’라는 극적인 반전을 보인 광고 시리즈를 내놓았다. 할 말은 사회상과 새로운 시대 소비자의 변화를 담았다고 했는데, 오래도록 가져가지는 못하고 거시기 되어버렸다. 사회와 문화의 맥락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 사례라 하겠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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