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패스트 라이브즈’와 ‘인연’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패스트 라이브즈’와 ‘인연’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4.03.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숨 가쁘게 빠르게 돌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한글로 ‘패스트 라이브스’라고 표기된 영화 제목을 그렇게 해석한 건, 어렸을 때 이민 간 교포 출신 감독의 자전적 영화라고 해서 내가 봤던 교포들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라 맘대로 재단한 결과였다. ‘빨리빨리’의 한국인이라면 ‘fast lives’가 어울리지 않는가. 타이완 여행을 가기 위하여 탄 중화항공 기내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의 최신 영화에 ‘Past lives’라고 쓰인 제목을 보고 선입견으로 혼자 맘대로 해석한 게 쑥스러워졌다.

내용도 모른 채 뜻을 정의해버리는 버릇은 그래도 고치지 못해, 영화도 보기 전에 ‘Past lives’는 ‘과거의 삶’이라고 해석했다. 미국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돌아가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산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과거를 그리워하며, 어찌 보면 굴레 같은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교포들을 꽤 많이 봤다. 아니 곤고한 현재 삶의 피신처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에서의 ‘과거past’는 그게 아니었다. 현재의 생 이전의 ‘전생前生’을 ‘Past lives’로 옮긴 것이었다.

부부가 되기 위하여 어떤 전생을 가졌어야 하는지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인연因緣’이라는 키워드를 끌고 온다. 감독 자기 모습을 투영한 12살에 미국에 이민 와서 작가가 된 주인공 여성은 그와 결혼하게 되는 미국인 작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There is a word in Korean – inyeon. It means providence or fate. But it’s specifically about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한국어에 ‘인연’이라는 낱말이 있어. 섭리 혹은 운명이란 뜻이지. 근데 사람들 사이 관계를 얘기할 때 주로 써.”

번역도 역시 내 마음대로 했다. ‘인연’은 ‘정情’, ‘한恨’과 함께 내가 뽑은 영어로 옮기기 힘든 대표적인 한국 단어 중의 하나이다. 예전에 한 미국 친구도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어려움을 충분히 겪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0년 전에 서울 소재 모 대학교의 글로벌경영대학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학생들과 일 년에 두 차례 정도 만나서,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격려해 주는 모임이었다. 프로그램 담당 교수님께서 한 멘토가 몸이 아파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면서, 그의 멘티인 미국인 학생 하나를 데리고 와서 함께 얘기해달라고 했다.

그 미국인 친구가 자기소개를 했다. 원래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로스쿨을 다니다가 한국어와 한국문화 공부를 하고 싶어서 휴학하고 왔단다. 대구에서 한국어를 배우다가 선생님과 친해져 결혼까지 해버렸다. 한국어 선생님인 부인과 함께 갑자기 미국으로 옮길 수 없어서, 한국에 있는 김에 MBA를 따며 공부하기로 해서 글로벌경영대학원에 들어왔단다.

그 미국 친구에 더하여, 미국 미네소타 출신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를 두고 네덜란드에서 중고교에 대학까지 마친 친구, 세르비아인 아버지와 크로아티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3살 때부터 덴마크에서 살았던 친구, 한국인으로 10살 때 조기유학으로 미국으로 가서 쭉 있다가 군대 간다고 돌아왔다가 군대 추첨에 계속 떨어지며 할 수 없이 대학원에 다니는 한국 친구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다국적 그룹으로 모여 얘기를 나누었다.

이후 한 주가 지나 대구 여자와 결혼한 미국 친구에게 연하장 봉투 같은 데 넣은 우편물이 왔다. 뜯으니, 사진처럼 엽서에 손 글씨로 감사하단 인사를 담았다. 그중 자신의 원래 멘토가 아파서 참석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내 테이블에 합류하여 얘기를 나눈 것은 좋았다며, 그게 '인연'인가 생각한다며 이렇게 썼다.

Although it is unfortunate that the mentor chosen for me fell ill, I am glad in a way, because I ended up being able to sit at your table. Thinking about it now, it feels like some sort of "인연".

제 멘토가 아픈 건 안 된 일이지만, 선생님의 테이블에 앉게 되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잘된 일이었죠. 지금 생각하니 이도 뭔가 “인연”이네요.

한글로 "인연"이라 쓴 것을 보고 한참 웃었다. 그러면서 영어로 ‘인연’을 뭐라 해야 할지 고민했다. 'destiny'는 너무 무겁다. 계속 짊어지고 가야만 할 것 같아 부담감이 더 크다. 'coincidence'는 반대로 너무 가벼워 순간으로 툭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다. 관계적인 데 초점을 맞춰 'tie', 'relationship'이라 하자니 우연스럽게 전개된 앞의 상황이 가려져 버린다. 가벼운 운명 같은 장난으로 엮어지는 만남과 관계를 표현하는 데는 한국어로 '인연'이라 해야지, 영어 단어 하나로 마땅히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 속뜻과 뉘앙스까지 알고 있는, 가끔 경상도 사투리까지 구사한다는 우리 인디애나 친구가 그래서 대견스러웠다. 어떤 언어를 쓰냐로 반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 영화에서의 ‘인연’은 앞에 나온 대사처럼 ‘relationship’에 초점을 맞췄다. 부러 너무 무겁고,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으려 한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내게 가장 재미있던 부분은 주인공으로 나온 그레타 리의 ‘교포 한국어’였다. 그에 덧붙여 남자 배우 유태오의 서툰 영어 연기도 실제 상황과 너무 비슷했다. 곧 배우들의 연기가 말로 하는 뜻을 넘어, 인연의 본질을 전달하는 듯했다. 부부의 연을 맺으려면 전생에 8천 겁의 인연을 가져야 한단다. 고교 시절의 한 친구가 전생에 8천 번 만나야 이승에서 옷깃 한 번 스친다는 말을 꽤 심각하게 한 적이 있었다. 어떤 인연으로 이 영화를 중화항공에서 보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한글로 ‘인연’을 써 보냈던 그 미국 친구도.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