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침묵의 방’을 백화점에 둔 까닭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침묵의 방’을 백화점에 둔 까닭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07.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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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Selfridge" 시즌 1
"Mr Selfridge" 시즌 1

[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We are going to show the world how to make shopping thrilling (쇼핑이 얼마나 짜릿할 수 있는 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비넥타이에 잘 차려입은 허풍기 있어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팡파르 나팔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큰 소리로 외친다. 세련된 유니폼을 갖춰 입은 미모의 여성 종업원들이 ‘즐기세요’라고 속삭이듯 유혹한다. ‘진열된 상품을 보기 전에는 당신도 몰랐던 욕망을 깨워드리겠습니다’라는 말에서는 새로운 기능의 제품을 쥐여 주기 전까지 소비자는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는 스티브 잡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헤롯(Harrods)과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백화점인 셀프리지(Selfridges)를 창업한 해리 셀프리지(Harry Gordon Selfridge)를 주인공으로 한 영국 ITV의 드라마 <Mr Selfridge>에서 최초 창업 시기 배경의 장면과 대사들이다.

해리 셀프리지는 원래 미국인으로 어릴 때부터 식료품점과 가구점 등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매장 실무를 익혔다. 성인이 되어서는 시카고에 소재한 미국을 대표하는 백화점인 마샬필드에 들어가 임원까지 올라갔다. 부인과 함께 유럽 여행을 하면서 영국 시장의 가능성을 봤다. 49세의 나이에 영국으로 이민해서 창업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미국식 경영과 마케팅을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의 영국 유통시장에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키워드가 바로 위에서 말한 ‘짜릿함(thrilling)’과 ‘즐거움(entertaining)’이었다.

셀프리지 루프가든 (출처 셀프리지)
셀프리지 루프가든 (출처 셀프리지)
셀프리지 쇼윈도 디스플레이 (출처 셀프리지)
셀프리지 쇼윈도 디스플레이 (출처 셀프리지)

해리 셀프리지는 그가 공언한 것들을 실현했다. 커다란 창을 만들고, 쇼윈도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하여 기존 상점들의 어두운 분위기와 차별화했다. 셀프리지가 옥스퍼드 가에 본점이라고 할 수 있는 백화점 문을 열기 전까지 제품들은 유리 장식장 같은 곳에 넣어두고, 고객이 지목하여 달라고 하면 꺼내서 주는 식이었다. 특히 화장품, 그중에서도 립스틱은 화류계 여성들이나 사용하는 것이라는 인식으로, 거의 숨겨놓고 파는 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셀프리지는 화장품, 향수, 액세서리와 같은 여성 제품들을 꺼내 놓아 직접 만지고 느끼고 향기를 맡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제는 상식이 된 백화점 1층을 여성 제품들 위주로 매장을 꾸민 것도 셀프리지가 최초였다고 한다. 백화점 옥상에 식당을 열고, 정원을 꾸며 패션쇼와 같은 행사를 열기도 하고, 겨울에는 아이스링크를 만들기도 했다. 최초로 영국해협 횡단에 성공한 비행기를 전시하고, 창업자 셀프리지와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있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를 비롯한 유명인들을 초청한 공연이나 기획전을 개최하는 등 백화점 이벤트 마케팅의 문을 활짝 연 곳이 바로 셀프리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헤롯이 중장년층이 주 고객이라면, 셀프리지는 그보다 젊은 세대의 백화점이란 인식이 강하다.

Silent Room (출처 셀프리지)
Silent Room (출처 BBC)

흥겨운 놀이 판이자 짜릿한 욕망의 분출구와 같은 셀프리지에 ‘Silent room(침묵의 방)’이란 반전의 공간이 있다. 번잡하고 시끄럽고 들떠 있는 백화점에서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으로, 창업자 셀프리지가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2013년 연말 쇼핑 성수기를 앞두고 셀프리지는 다시 ‘침묵의 방’을 열었다. 이번에는 명상 전문가와 협업하여 고객들이 침묵과 함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했다. 그와 연결해서 1층에는 ‘조용한 매장(Quiet Shop)’을 열었다. 그 매장에서는 영국에서 빵에 발라 먹는 스프레드로 유명한 마마이트, 하인즈 토마토케첩, 리바이스 청바지, 질 샌더 의류 등을 로고와 브랜드 태그를 떼고 판매했다. 브랜드 로고나 워드마크 같은 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니, 그런 걸 없앤 상태를 조용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최초의 ‘침묵의 방’을 생각하면, ‘위대한 쇼맨’의 바넘(P.T.Barnum)을 연상시키는 해리 셀프리지가 그런 공간을 만들었다는 게 역설적이다. 사실 셀프리지는 부인과 함께 온 남자들을 위해서 그 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인 옆에 멀뚱 서 있거나, 하품이나 하고 있지 말고, 편하게 있으라고 만든 방이었다. 지겨워하는 표정이 역력한 남자들이 보이지 않아야, 부인들이 맘껏 쇼핑을 즐길 수 있기도 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쇼핑에 빠져드는 21세기 ‘침묵의 방’은 물신자본주의에 휩쓸린 자신을 찾으라고 ‘명상’을 가치로 내놓았는데, 실상은 아마도 잠깐 휴식을 취하고, 힘을 내서 더 많이 쇼핑하라는 것이 아닐까.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인하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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