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팬시(Fancy)와 판타지(Fantasy)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팬시(Fancy)와 판타지(Fantasy)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06.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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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현대 사회의)이러한 극단적인 불평등이 지속가능할지 여부는 억압적 기구의 효과성뿐만 아니라 아마도 일차적으로 정당화 기구의 효과성에 달려 있을 것이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나온 구절이란다. <엘리트 독식사회>(정인경 옮김, 생각의힘 펴냄, 2020)의 저자인 아난드 기리다라다스는 이를 보고 자신의 '책의 의도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한 구절'이라고 했다. 이 구절을 읽은 그날 바로 자신의 책이 '정당화 기구에 대한 연구일 것'이라고 결정했다고, 책 뒤에 붙은 '감사의 글'에 썼다. 기리다라다스의 집필 행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손이 가는 대로 글이 생각보다 앞장서 나가다가 어느 순간에 자신의 애초 집필 목적이 무엇인지 모호해진다. 글을 거의 써 놓고, 자신의 책을 뭐라고 브랜딩 해야 할지 가늠을 못하며 사막을 헤매다가 위의 구절과 같은 오아시스를 만난 것이다.

토마 피케티의 책을 대부분의 사람처럼 집어 들었다가 제대로 읽지 않아서, 저 구절은 기억에 없다. 비록 인용 구절이지만, 나의 피로해진 눈도 확 뜨게 만들었다. 불평등은 잘못된 결과인데, 그걸 유지하는 건 채찍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어찌 보면 툭툭 부정기적으로 던져주는 당근이 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 모른다. 재산을 기준으로 형성된 신자유주의적 계급 구조에서 과거와 같은 물리적 폭력이 수반되곤 하는 억압적 기구는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불공정을 수면 아래 감춘 채 진행된 경쟁의 결과로 수용시키는 세뇌에 가까운 작업이 행해진다.

광고의 대부분은 어쩌면 정당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나쁘게 보면 써야 할 필요가 없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쓰도록 세뇌를 시킨다. '팬시 상품', '팬시 숍' 등 우리가 주로 접하는 '팬시'라는 단어는 예쁜 장식이 들어가거나 모양을 낸 소녀 취향의 제품들을 가리킨다. 'fancy'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짚어보면 'fantasy'를 줄여 중세부터 쓰였다고 한다. 그 ‘팬시’가 일상적으로 쓰이게 된 건 마케팅, 그중에서도 브랜딩의 힘이었다.

<싸구려의 힘>(웬디 월러슨 지음, 이종호 옮김, 글항아리 펴냄, 2022) 책 47쪽에 보면 다양한 잡동사니 같기도 한 싸구려들을 파는 가게 주인들이 그들이 취급하는 상품을 '팬시 상품 fancy goods'라고 불렀다고 한다. '잡화 variety'보다는 세련된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 . . . ‘fancy’ was an early modern contraction of ‘fantasy’ and a more refined descriptor than ‘variety.’"

줄이기 전 원래의 말인 '판타지fantasy'와 연결하면, 상상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효과적인 브랜딩 작업은 대놓고 이끌거나 말하지 않아도, 그 원천까지 사람들에게 슬쩍 노출시키며 무의식적으로도 연결을 시킨다. ‘팬시 상품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이들도 당연히 있었다. 가게 주인들도 뒤돌아 서서는 고객 여성들의 뒷담화를 하는 식으로 말했다. 바로 여성들이 즐겨서 구입하는 '쓸데없이 좋은 물건'을 '팬시'라고 했다.

“ ‘Fancy’ meant, according to one account, a great variety of ‘good- for-nothing’ things which women are so fond of purchasing.”

​한국에서 '팬시'라고 하면 '아트박스'에서 파는 것과 같은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학용품이 먼저 생각났는다. 이제는 트와이스의 노래 'Fancy'를 떠올리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다. 노래 가사에서 굳이 문법적인 걸 따지는 게 이상하지만, 여기서 '팬시'는 'I fancy you'처럼 동사로 쓰였다. '원한다', '반하다' 정도의 뜻인데, 약간 성적(sexual) 의미를 담고 있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게 그저 이쁘게만 보이는 시각적 ‘팬시’가 생생하게 꿈틀거리며 손에 잡히는 더 이상 환상의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 된다.

What? fancy you 누가 먼저 좋아하면 어때
Fancy you 지금 너에게로 갈래
Fancy, ooh

연기처럼 훅 사라질까
늘 가득히 담아 두 눈에 담아
생각만으로 포근해져
몰래 뒤에서 안아 널 놓지 않을래

(‘팬시’ 가사 중)

위대한 트와이스가 만든 팬시의 반전이다.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인하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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