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지겹고 피곤한 것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지겹고 피곤한 것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2.06.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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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주 52시간 근무제가 지난 정권에서 한참 논란이 되었다. 특히 원래 마감에 쫓기며 야근이 일상처럼 횡행했던 업계에서는 현실을 모르는 불가능한 제도라고 했다. 광고계도 그중의 하나였다. 제도 시행 이후, 광고 회사에서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친구들이 후배들을 두고, “요즘 친구들에게는 남아서 일하라고 할 수도 없어요. 팀장 이상들이 남아서 하죠”라며 자조적으로 투덜거리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는 ‘주 92시간’이 화제가 되었다. 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추가 근무를 한 주에 몰아버리면 한 주 92시간 근무가 가능하다는 말이 나왔다. 다른 편에서는 퇴근 후 11시간 휴식, 4시간 근무마다 30분 휴식이라는 제도를 감안하면 최대한으로 해도 기껏해야(?) 주 69시간밖에 근무할 수 없다고 한다. 누가 더 철야 근무를 오래 했는가를 두고 말싸움하고, 오전 근무를 하고 자신의 결혼식에 갔으며 특근수당이 본봉과 비슷했다고 자랑하는 이들에게는 주 92시간도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 이들의 시대에도 사실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직장인이 부인의 전송을 받으며 출근하려다가 현관 앞에서 갑자기 돌아서며 외친다. “나, 오늘 쉴래!” 이어 ‘샐러리맨은 쉬고 싶다’, 그리고 ‘왜?’라고 묻는 자막이 뜨고 “피곤하니까”라는 대답이 나온다. 이어 활원으로 영양과 활기를 보충한 샐러리맨이 힘차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동료들에게 인사한다. 1993년에 처음 나온 피로회복, 영양공급을 내세운 ‘활원’이라는 음료의 광고였다. 이 광고 이후에는 ‘샐러리맨은 퇴근하고 싶다’라는 게 ‘퇴근 편’이란 제목으로 뒤를 이었고, 앞선 편은 ‘출근 편’이라고 불리었다. 당시 인기 절정의 탤런트 유동근이 출연한 이 광고는 ‘왜? ---니까’라는 파생된 표현이 이어지면서 그 시절의 유행어로 자리 잡을 장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를테면 ‘학생은 놀고 싶다. 왜? 공부하기 싫으니까’ 같은 객쩍은 농담들이 퍼졌고, 아침에 출근하기 싫어서 미적거리면 ‘출근하기 싫어. 유동근이야’ 같은 소리를 듣곤 했다.

올해 들어서 출근하기 싫어하는 이가 다시 광고에 나타났다. 잠에서 막 깬 얼굴로 ‘학교 가기 싫다’라고 혼잣말을 한다. 영락없이 게으른 대학생으로 보이는데, 아침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가 “가야지”라며 툭 던진다. “네가 선생님인데.” 학생이 아닌 선생님이었다는 최초의 반전이 일고, 화면이 빠르게 전환되며 선생님을 보고는 기뻐서 열광하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함성과 반가운 손짓이 나오며 ‘반가운 만큼 힘도 들지만 이 순간을 기다려 왔잖아요’라는 자막과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러고는 밝은 얼굴로 박카스를 마시는 선생님과 함께 ‘다시 힘내자’라는 태그라인이 뜬다. 이렇게 끝내면 그저 평범했을 터인데, 마지막 순간에 반전의 장면이 나온다. 그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멍한 얼굴로 “밥하기 싫다”라고 혼잣말을 하자, 학교 가기 싫다고 한 선생님 딸이 어느 순간에 나타나 “피곤하지?”라고 부가 의문문 형식으로 물으며 광고가 끝난다. 어떤 장면이 이어질지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광고 속 엄마의 혼잣말에 얼마 전에 했던 처와의 대화가 생각나며 더욱 공감되었다.

"엄마, 운동을 해야 해요. 시간 정해 걸으셔요."

어느 날 아침에 처가 장모님과 통화하며 몸을 움직이시라고 강하게 권유했다. 전화를 끊은 후에 '장모님은 잘 걸어 다니시잖아?'라고 물었더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아까워서 걷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장모님은 80세가 넘은 지금도 열심히 책을 읽고 논문 발표를 하신다. 그래서 "칸트는 그러지 않았잖아"라고 했더니 대답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서 나온다.

"칸트는 지가 밥을 차리지 않았잖아."

밥을 짓고 차리면서 공부하는 여자들은 운동이나 산책에 쓸 시간이 없다는 얘기였다. 밥 짓기·차리기는 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이고, 코로나19 시국으로 그 부담은 더욱 심해졌다. 어쩌다가 김훈 작가의 <밥벌이의 지겨움> 책이 언급되었을 때 '밥 짓기의 지겨움은 그 100배'라고 바로 응수했을 정도이다.

일이 지겹게 느껴지면 주 52시간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고문의 시간으로 여겨질 것이다. 주 4일 하루 6시간 근무라고 해도 출근하기 싫고, 퇴근 시간은 더디게만 온다. 주 92시간이건 69시간이건 시간의 양적인 부분을 놓고 가시 돋친 말들만 오가지 않고, 뭔가 그 시간의 질적인 반전을 꾀하는 계기가 마련되기 바란다.

 


※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인하대·한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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