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업계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다. "RFP(Request for Proposal, 제안 요청서)의 수준이 곧 클라이언트의 수준이다." 이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좋은 RFP는 프로젝트의 방향성과 목표가 명확하다. 클라이언트가 브랜드 전략을 깊이 고민하고 있으며, 에이전시가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가이드를 제시한다. 반면, 나쁜 RFP는 전략적 사고 없이 '그럴듯한 뭔가'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비효율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클라이언트와 에이전시 모두 시간과 리소스를 낭비하는 희망 고문에 빠진다.
좋은 RFP는 프로젝트의 성패를 결정한다
RFP는 단순한 요청서가 아니다. 그것은 클라이언트가 프로젝트를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지, 브랜드 전략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문서다.
좋은 RFP의 특징은 명확하다.
- 목표가 뚜렷하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목적은 무엇인가?"
- 기대하는 성과(KPI)가 구체적이다: "성공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 브랜드와 시장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 파트너(에이전시)에게 명확한 도전 과제를 제시한다: "창의적인 해법이 필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이런 RFP를 받으면, 에이전시는 보다 정교한 전략과 창의적인 솔루션을 제안할 수 있다. 반대로 나쁜 RFP를 받으면, 프로젝트의 방향성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쁜 RFP의 전형적인 특징
나쁜 RFP는 한눈에 티가 난다. 공통적으로 전략적 고민이 부족하고, 방향성이 모호하며,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다음과 같은 문장이 포함된 RFP를 본 적이 있는가?
- "요새 잘나가는 걸로 해주세요."
-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고 싶어요."
-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 "그냥 알아서 좋은 거 제안해 주세요."
- "MZ들이 좋아하는 거 있잖아요? 그런 느낌으로 해주세요."
- "예산은 열려 있습니다."
이런 브리프의 공통점은 한 가지다. 클라이언트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른다는 점.
"요새 잘나가는 걸로 해주세요."
- 하지만 트렌드는 시시각각 변한다.
- 지금 인기 있는 것이 우리 브랜드와 맞는지도 고민하지 않는다.
"MZ들이 좋아하는 거 있잖아요?"
- MZ세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조차 고민하지 않고 그냥 "그런 느낌"을 요구한다.
- 하지만 MZ세대는 감각적이고 빠르게 변하는 소비자층이다.
- 단순히 "MZ 감성"만 따라간다면 브랜드 정체성은 흐려지고, 효과적인 전략은 나오기 어렵다.
"예산은 열려 있습니다."
이 문장은 희망 고문이다.
- 클라이언트가 실제로 예산을 열어둘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다.
- "최고의 결과물을 받고 싶다"는 욕심일 뿐, 정작 예산을 더 만들 생각은 없다.
- 아반떼 살 예산을 가지고 포르쉐 매장을 둘러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기대를 품은 상태에서, 에이전시는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
이런 브리프는 결국 에이전시의 리소스를 소진시키고, 비효율적인 제안 경쟁만 초래한다.
오픈 브리프? 전략이 없는 클라이언트의 변명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오픈 브리프(Open Brief)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보고 싶어요."라는 말은 언뜻 들으면 창의적인 접근을 존중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에 가깝다.
오픈 브리프가 초래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 방향성이 없으니, 제안도 제각각이다: 에이전시마다 다른 해석을 하게 되고, 제안들이 비교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 결정이 어려워지고, 프로젝트가 표류한다: 내부적으로도 기준이 없으니, 클라이언트는 어떤 제안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게 된다.
- 불필요한 리소스 낭비가 심각하다: 제대로 된 브리프가 있었다면 빠르게 최적의 솔루션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불필요한 제안 작업만 반복된다.
오픈 브리프는 클라이언트가 스스로 고민해야 할 전략적 의사결정을 회피하는 방식일 뿐이다.
결국, 좋은 브리프가 좋은 결과를 만든다
결국, 좋은 결과를 원한다면 클라이언트 스스로 먼저 좋은 RFP를 작성해야 한다.
- 목표와 방향성이 명확한가?
- 내부적으로 충분한 논의를 거쳤는가?
- 파트너(에이전시)에게 던지는 핵심 과제는 무엇인가?
이런 고민이 선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에이전시와 협업해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에이전시는 클라이언트의 전략 부서를 대체하는 곳이 아니다. 클라이언트가 스스로 고민하지 않는다면, 에이전시가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를 내도 겉도는 결과만 나올 수밖에 없다.
RFP의 수준이 곧 클라이언트의 수준이다. 좋은 결과를 원한다면, 먼저 좋은 RFP를 작성하라. 그것이 브랜드 리더십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