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회사 근무수칙] 14. 쓸까, 말까? 또렷함이라는 두려움.

[광고회사 근무수칙] 14. 쓸까, 말까? 또렷함이라는 두려움.

  • 하인즈 베커 칼럼니스트
  • 승인 2025.05.28 2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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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불은 위험하다. 너무 또렷한 아이디어는 늘 무섭다.
아이디어가 나를 찾아오는 순간.

[ 매드타임스 하인즈 베커 칼럼니스트] 가끔씩. 아주 가끔씩. 모든 게 너무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아이디어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 내가 억지로 끌어낸 것도, 머리를 쥐어짜 낸 결과도 아니다. 그냥, 이미 존재하던 문장 하나가 불쑥 떠오른다. 이미지 하나. 그걸로 다 설명된다. 슬로건부터 키비주얼까지, 기획의 뼈대가 한 번에, 한 줄로. 이보다 더 정확할 수는 없는 형태로.

기획이 내 손에 오는 날. 정확히는 기획이 나를 쓰기 시작하는 날. 문제는 그 순간의 기분이다. 기쁘지 않다. 유쾌하지도 않다. 오히려 갑작스레 어두워진다. 도무지 설명하기 힘든 어떤 ‘울음’ 같은 감정이 기분보다 먼저 온다. 이건 쾌감이 아니다. 이건, 공포에 더 가깝다.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귀에 속삭여주고 간 것 같은 착각. 그래서 꺼림칙하다.

크리에이터는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하루에도 수십 번, 할까 말까, 쓸까 말까, 묻고 또 묻는 존재다. 아이디어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걸러내는’ 사람.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갈 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를 결정하는 편집자. 그리고 오늘 같은 날, 너무 또렷한 아이디어를 만나면, 우리는 그 아이디어가 맞는지보다, 너무 쉽게 맞아버린 것은 아닌지부터 의심한다.

이건 직감이다. 크리에이터가 가진 유일한 직업병. 안다는 것. 너무 잘 안다는 것. 그래서 오히려 쓰기 싫다는 것. 오늘 머릿속에 스쳐간 그 한 줄을 나는 결국 쓰게 될 것이다. 지금 이 글처럼.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고, 나는 이제야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럴 때면, 조금 늦게 찾은 예언서를 펼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두렵다. 이미 정해진 문장을 이제야 읽는 사람처럼.

누군가는 이 감정을 알 것이다. 기획을 직업으로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밤새 종이 위에 수백 개의 문장을 써보고, 아침에 일어나 처음 떠오른 그 문장 하나가 정답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본 사람이라면. 그건 행운이 아니라, 예고된 징조다.

빨간 불이 아니라, 파란불이 위험하다. 파란불은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예측 가능한 기획은 늘 위험하다. 너무 잘 맞는 아이디어는 늘 무섭다. 너무 정확한 답은, 늘 경계의 대상이다. 쓸까. 말까. 이건 정말 써도 되는 문장일까?

 


하인즈 베커 Heinz Becker  

30년 가까이 전 세계 광고회사를 떠돌며 Copy Writer, Creative Director, ECD, CCO로 살았다. 지휘한 캠페인 수백개, 성공한 캠페인 수십개, 쓴 책 3권, 영화가 된 책이 하나 있다. 2024년 자발적 은퇴 후, 브런치와 Medium에 한글과 영어로 다양한 글을 쓰면서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Cosmopolitan. Writer. Advertising Creative Director. Created hundreds of advertising campaigns and written three books. One of them was made into a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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