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드타임스 하인즈 베커 칼럼니스트] 1. 제안서는 설명서가 아니다.
그건 설득의 마지막에 필요한 요약이지, 설득의 첫 번째 수단은 아니다. 대부분의 기획자들이 범하는 가장 큰 착각은 이것이다. ‘기획서를 잘 만들면 된다.’ 아니다. 기획이란 본래 '보이는 게 아니라, 들리는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얘기를 멋진 슬라이드로 포장하면 그건 말이 안 되는 디자인이다.
설득이 안 되는 전략은 아무리 정교하게 디자인해도, 결국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고객은 데이터를 보지 않는다. 고객은 사람을 본다. 고객은 슬라이드를 기억하지 않는다. 고객은 태도를 기억한다. 그래서 설명을 하려는 시도부터 멈춰야 한다. 기획은 논리가 아니다. 기획은 리듬이고, 멜로디고, 톤이다. '무엇을 말할까'보다 '어떻게 들릴까'가 훨씬 더 중요하다.
실무자는 제안서를 보고 판단하지만, 결정권자는 '기획자를 보고 판단'한다. 제안서를 남과 같은 PPT로 쓰는 순간, 이미 게임 오버다. 기획자는 스스로의 기획을 목소리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가끔,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제안서 대신 노래나 한 곡 만들자. 기획은 곡이고, 발표는 노래다. 자, 이제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해보자. 밴드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
그러면 스태프들은 당황한다. 하지만 광고든 브랜드든, 모든 기획의 첫 청중은 언제나 사람이다. 그 사람의 심장을 울리지 못하면, 아무리 정확한 논리도 결국 튕겨나간다. 기획이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만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안은 설명이 아니다. 제안은 혁명의 선언이다. 혁명은 말로 시작해서, 역사로 끝난다. 그러니, 설명하려 들지 말자. 그냥 말하자. 그냥 말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다시 짜야한다.
2. 설득은 결국, 말이 아니라 태도로 남는다.
언제나 나는 지루했다. 반복되는 프레젠테이션, 들은 적 있는 반론, 예상 가능한 질문들. 수십 년간 일을 하다 보니, 만난 문제들은 대체로 고만고만했고 그 대부분은 내가 이미 몇 번씩 풀어본 것들이었다. 답이 보이는 질문은 나를 지루하게 만든다.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패턴을 꿰는 기분. 이건 일이 아니라 습관이다.
그러다 이번엔 좀 다르게 생긴 문제지가 도착했다. 처음 보는 형식, 익숙하지 않은 언어, 예측이 되지 않는 상대.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회의실 칠판에 이렇게 답을 적었다.
“큰소리로 외친다고 해서 설득이 되는 건 아닙니다. 진짜 설득은, 조용히 도움을 요청할 때 시작됩니다. 그러니 먼저 부탁합시다. 그것이 당신이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문장을 결국 광고주 앞에서 말했다.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자는 그렇게 하자고 답했다. 그래서, 하지 않았던 일이 시작되었다. 이건 협의가 아니라 요청이었고, 전달이 아니라 교감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라 대화였다.
설득은 결국, 말이 아니라 태도로 남는다. 무슨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자세로 말했는가가 사람들의 기억을 만든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성보다 감정을 먼저 호출한다. "누군가를 움직이고 싶다면, 설득하려 하지 말고 부탁하라." 크리에이티브도, 마케팅도, 리더십도, 결국은 부탁이다. 나를 믿어달라는, 내 편이 되어달라는, 함께하자는 제안.
그제야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지루했던 설득은, 그렇게 끝났다.
3. 진심 커뮤니케이션.
"진심을 말해!" 이런 말은 언제나 멋져 보인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면, 진심은 늘 리스크니까. 기획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진심’이다.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회피되는 것도 진심이다. 왜냐면, 진심은 항상 검열을 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심은 찬반이 갈린다. 진심은 공감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부당한다. 진심은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지만, 누군가에겐 위협이 된다. 그래서 브랜드는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대행사와 실무자는 기획안에서 감정을 삭제할 것을 먼저 요구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을 슬라이드를 만든다. 아무 감정도 남지 않는 보고서를 쓰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문장을 남긴다.
하지만 그렇게 안전해진 기획은,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는다. 기획은 정확해졌지만, 아무도 감동하지 않는다. 브랜드는 계속 돈을 태운다. 슬로건은 바뀌었지만, 아무도 따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회의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많다. “그렇게까지 솔직할 필요 있을까?” 나는 이런 질문이 지금의 모든 브랜드를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래, 솔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감동을 원한다면, 반드시 솔직해야 한다. 진심은 언제나 위험하다. 하지만 진심 없는 커뮤니케이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획자가 리스크를 지지 않으면, 소비자는 반응하지 않는다.
정치인도, 브랜드도, 교회도, 광고회사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가장 위험한 문장을 찾는다. 내가 두려운 그 한 문장이, 결국 모든 것을 바꾸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말. 사실은, 모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이것이 진심의 역설이다. 그러니, 진심을 말하자. 리스크는 책임지면 된다. 하지만 진심은, 꺼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커뮤니케이션의 마지막 원칙이다. 그리고, 내가 믿는 첫 번째 원칙이기도 하다.
하인즈 베커 Heinz Becker
30년 가까이 전 세계 광고회사를 떠돌며 Copy Writer, Creative Director, ECD, CCO로 살았다. 지휘한 캠페인 수백개, 성공한 캠페인 수십개, 쓴 책 3권, 영화가 된 책이 하나 있다. 2024년 자발적 은퇴 후, 브런치와 Medium에 한글과 영어로 다양한 글을 쓰면서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가끔은 강의와 프로젝트에도 참여한다.
Cosmopolitan. Writer. Advertising Creative Director. Created hundreds of advertising campaigns and written three books. One of them was made into a mo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