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회사 근무수칙] 15. 디지털 비정성시(非情盛時).

[광고회사 근무수칙] 15. 디지털 비정성시(非情盛時).

  • 하인즈 베커 칼럼니스트
  • 승인 2025.05.30 0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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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은 기록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흐름을 위한 파이프다.

[ 매드타임스 하인즈 베커 칼럼니스트]전인권은 노래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디지털에서 지나간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인쇄광고는 최소한 종이라도 남는다. 포스터 한 장, 스크랩북 속 잘린 한 면, 혹은 누군가의 서랍 속에 숨은 비장의 클리핑.디지털 광고는 다르다. 서버가 닫히면 사라지고, 플랫폼이 사라지면 존재 자체가 말소된다. 저장을 하지 않으면, 캡처하지 않으면, PDF로 내려받지 않으면—그건 애초에 없었던 것과 같다.

네이버가 아니라 야후가 대장이던 시절이 있었다. 싸이월드가 없었다면 누가 ‘감성’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었을까. 내 인생 최초의 고난을 안겨 준 작가네트. 무려 12만 명이 텍스트로 세상을 바꾸겠다며 밤을 새우던 그곳. 지금은? 도메인 하나 끊기면 모든 것이 공중분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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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은 있지만, 존재는 없다. 검색은 가능하지만, 맥락은 없다. ‘아카이브’라는 단어는 그저 박제된 URL일 뿐.

디지털은 영원의 약속을 한 적이 없다. 단지 ‘지금’의 효율을 극대화했을 뿐이다. 우리는 그 편리함에, 그 빛나는 UX에 속아 ‘기억’까지 위탁했다. 클라우드에, 구글 드라이브에, 피드와 타임라인 속에. 그게 사라졌을 때, 무엇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지 누구도 답하지 않는다. 얼마 전, 10년 전에 내가 지휘한 캠페인을 찾아보려 했다. 결과물들이 너무 예뻤고, 반응도 좋아서 다시 꺼내보고 싶었다. 결과는? 클라이언트 웹사이트 리뉴얼로 서버가 정리됐고, 당시 프로덕션은 해산됐으며, 내 맥북 백업은 용량 문제로 2년 전부터 덮어쓰기 되었다. 다시 말해—존재했던 모든 흔적이 사라졌다.

내가 만들었고, 누군가도 분명히 봤고, 그 해 클라이언트는 매출을 올렸던 캠페인. 하지만 지금은, 증명할 길이 없다. 그건, 존재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디지털에서는. 우리는 신기루 위에 도시를 쌓았다. 데이터가 모이고, 공유되고, 전파되고, 소비되지만— 증거는 없다. 캠페인 폴더도, 광고주의 감동도, 수상작 리스트도 서버가 닫히면 다 끝이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글도 그렇다. 브런치가 사라지면? Medium 서비스가 종료되면? ‘좋아요’ 숫자조차 의미 없는 데이터가 된다. 디지털은 냉정하다. 정확히는, 비정하다. 그건 기록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흐름을 위한 파이프다. 흐르고 나면 끝이다. 무엇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다. 그것이 디지털의 본질이다.

그러니까, 오늘도 말하자. 지금 해야 할 말을, 지금 해야 한다. 기록보다 표현을. 아카이브보다 흔적을. 우리의 손끝에서 사라지기 전에.

 

하인즈 베커 Heinz Becker   

30년 가까이 전 세계 광고회사를 떠돌며 Copy Writer, Creative Director, ECD, CCO로 살았다. 지휘한 캠페인 수백개, 성공한 캠페인 수십개, 쓴 책 3권, 영화가 된 책이 하나 있다. 2024년 자발적 은퇴 후, 브런치와 Medium에 한글과 영어로 다양한 글을 쓰면서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  

Cosmopolitan. Writer. Advertising Creative Director. Created hundreds of advertising campaigns and written three books. One of them was made into a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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