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르페브르(Pum Lefebure)는 디자인 아미(Design Army)의 공동 창립자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예술과 패션, 공연, 브랜딩을 하나의 언어로 통합해 온 창작자다. 올해 D&AD 2025 그래픽 디자인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그녀는 다양한 문화와 매체, 기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고 있다. 박지혜 서비스플랜 코리아 PR팀 차장이 그녀를 만나 창의성, 크래프트, 그리고 디자인의 시대적 역할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예술, 패션, 공연, 브랜딩을 하나의 언어로 통합해 오셨습니다. 당신에게 ‘창의성’의 정의는 시간이 지나며 어떻게 변화해 왔나요?
저는 태국 방콕에서 자란 예술을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그림을 좋아했고, 대학에선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죠. 이후 약 10년간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아트 디렉션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패션과 에디토리얼 디자인, 특히 2000년대 초반 하퍼스 바자 같은 매거진의 강렬한 이미지와 타이포그래피의 조화에 매료됐거든요. 이후 유튜브 시대가 열리면서 영상에도 관심이 생겨 패션 필름을 시작했고, 점점 영화 제작과 연출로 확장됐습니다.
제 창의성은 늘 ‘진화’였어요. 멈추지 않고 계속 배우고 적응해 왔죠. 대학에서 배운 지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매체와 기술에 유연하게 반응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저는 ‘적응력’이야말로 모든 삶과 창작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워싱턴 발레단, 홍콩 발레단 프로젝트처럼 이야기와 움직임, 정체성이 어우러진 작업은 어떤 출발점에서 시작되나요?
이런 프로젝트는 반드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야 해요. 감정이나 형태보다 먼저 전략이 명확해야 하죠. 예컨대 홍콩 발레 프로젝트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어떻게 하면 발레가 홍콩 시민들에게 더 가깝고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리고 “홍콩이라는 도시를 어떻게 발레에 녹여낼 수 있을까?” 결국 이 프로젝트는 ‘춤이 문화를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말이 아닌 몸짓으로 감정을 전해야 하니까요. 관객이 브랜드를 ‘느끼게’ 만드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해요.
시각적 속도와 즉각적 인상이 중요한 시대에, 공들인 디자인(Craft)의 가치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시나요?
오히려 지금 같은 시대일수록 크래프트(Craft, 공예 감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AI 툴로 멋진 이미지를 쉽게 만들 수 있지만, 감동은 잘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예쁘긴 한데 감정이 없어요.
반면 누군가 손으로 직접 그리고, 수많은 시간을 들여 만든 짧은 애니메이션이나 오브제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죠. 저는 AI는 ‘생성’하지만, 인간은 ‘창조’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격차예요.
태국과 미국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아오신 경험이 창작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제 삶의 절반은 태국, 나머지 절반은 미국에서 보냈어요. 태국에서는 매일 아침 절과 스님, 매운 음식, 전통 색을 보며 자랐고, 그런 시각 경험이 색채 감각에 큰 영향을 줬어요. 미국 디자이너들과 비교해도 저는 더 선명하고 대담한 색을 자주 써요.
또 하나, 저에게는 태국식 유머가 있어요. 태국 광고는 항상 유쾌하고 위트 있잖아요. 아름다움만 추구하지 않고, 그 안에 ‘장난기’나 ‘틀을 깨는 요소’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요. 저는 그런 미학을 “awkward beauty”라고 불러요. 조금 어색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아름다운 것. 완벽보다 살짝 이상한 것이 더 매력 있다고 믿어요.
문화적 배경은 작업에서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하고,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당신에게는 어떤가요?
패션을 예로 들어볼게요. 샤넬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갖춘 룩도 물론 멋지죠. 하지만 여기에 고등학생 때 입던 낡은 티셔츠나 빈티지 벨트, 혹은 H&M 같은 브랜드의 아이템을 하나 섞는다면 전혀 다른 스타일이 탄생해요. 때로는 오래된 티셔츠를 리폼하거나, 직접 잘라보는 실험을 통해 나만의 유니크한 감각을 만들 수도 있고요.
저는 늘 그런 믹스매치를 좋아했어요. 고급과 일상, 동양과 서양, 정통성과 실험성처럼, 서로 다른 요소가 만나서 만들어내는 긴장감이야말로 디자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해요. 제 정체성 자체도 그런 조합이에요. 저는 태국계이자 중국계이고, 프렌치 성을 가진 남편과 미국에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디자인을 할 때도 디자인 자체보다는 건축, 패션, 음식, 여행, 자연 같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 더 큰 영감을 받아요. 자연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니까요.

D&AD 그래픽 디자인 부문 심사위원장으로서, 작품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본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아이디어, 완성도, 크래프트는 기본이고, 저는 ‘스케일’을 특히 중요하게 봤어요.
예를 들어 디자이닝 파리 2024(Designing Paris 2024), 파리 올림픽 브랜딩 사례는 정말 인상 깊었어요. 몇몇 심사위원들은 주저했지만, 저는 이 작업의 역사적 의미와 스케일을 밀어붙였죠. 전 세계인이 보게 될 브랜드잖아요. 모바일 화면에서도, 에펠탑 앞 거대한 설치물에서도 잘 보여야 하니까요. 사용된 색상도 일반적인 스포츠 컬러와는 달랐어요. 빨강이나 파랑이 아니라, 파리라는 도시에서 영감을 받은 라벤더, 민트, 핑크 같은 부드러운 색이었죠.
이런 디자인은 단순한 그래픽을 넘어서, 장소와 시대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키는 작업이에요. 그래서 정말 감동이 있었어요.
심사위원장으로서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심사위원들과 토론을 이끌어가는 과정은 어땠나요?
문화적 배경이 다른 심사위원들과의 토론은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저는 모든 의견이 동등하게 존중받도록 노력했죠.
다만 때로는 “너무 디자이너 시선으로만 보지 말자”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전문가일수록 폰트 크기, 자간 같은 세부 요소에만 집착할 수 있는데, 그렇게 훌륭한 작업이 탈락하는 건 아쉬운 일이에요. 디자인은 정답이 있는 수학이 아니니까요. 전체 맥락과 문화적 의미, 감성을 읽는 게 더 중요해요.
‘디자인이 왜 중요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 작품이 있었다면 소개해 주세요.
역시 또 ‘디자이닝 파리 2024’ 얘기네요. (웃음)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정말 인상 깊었어요. 단순한 브랜딩을 넘어서, 하나의 도시 정체성을 전 세계에 전달한 상징적인 사례였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가 도시의 비전을 대통령이나 CEO와 함께 논의하며 만들어가는 그 과정 자체가 정말 특별했죠.
예를 들어 보통 육상 트랙은 오렌지색이지만, 파리 올림픽에서는 보라색 트랙을 선택했어요. 30년이 지나고 누군가 그 사진을 다시 본다고 해도 단번에 “아, 저건 파리 2024였지”라고 기억하게 될 거예요.
그게 바로 디자인의 힘이자, 유니크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특정 해, 특정 도시만의 분위기와 문화를 ‘시각적 신호’로 남기는 것. 디자인은 그 시대의 특별함을 기록하고, 기억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예요.
디자인은 현재를 반영하는 ‘거울’일까요, 미래를 여는 ‘나침반’일까요?
프로세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저는 디자인은 ‘둘 다’라고 생각해요.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면, 먼저 지금 무엇이 트렌드인지 정확히 이해해야 하죠. 현재 어떤 흐름이 ‘핫’한지 알아야 그것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 방향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늘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려고 해요. 지금을 제대로 알아야만, 그 너머를 상상하고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현재를 통찰하고 그 위에서 미래를 그리는 것, 그것이 디자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이미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넓히고 계시는데요, 앞으로 세계로 나갈 아시아 창작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저는 저 자신을 ‘유명하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창작은 내리막을 향한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저는 매일 마치 스타트업처럼 시작하려고 합니다. 큰 상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팀과 짧게 축하를 나눈 뒤, 바로 “이제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하지?”를 고민하죠. 머무르지 않고 유연하게 사고하며, 끊임없이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태도. 그게 저에게는 더 중요해요.
저는 ‘유명세’보다 ‘의미 있는 작업’을 좇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문화를 조금이라도 바꾸는 일. 그게 제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이고, 창작이 가진 진짜 힘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저희는 하나의 영상, 한 프레임을 만들 때도 매 순간을 밀도 있게 쌓아갑니다. 어떤 장면을 무작위로 멈춰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작품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다는 확신이 들면, 더는 미련도 후회도 없습니다. 더 손댈 필요가 없는 작업. 바로 그게 우리가 꿈꾸는 최고의 상태입니다.
펌 르페브르(Pum Lefebure)는 워싱턴 D.C.에 위치한 디자인 아미(Design Army)의 공동 창립자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태국 출신인 그녀는 예술성과 상업성을 결합한 독창적인 비주얼 언어와 글로벌 감각을 바탕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어도비, 넷플릭스, 더 리츠칼튼, 홍콩발레단 등 세계적인 브랜드 캠페인을 이끌어왔다.
D&AD, 칸 라이언즈, 원쇼, 클리오 등 주요 국제 디자인 어워즈에서 심사위원장 및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다수의 권위 있는 디자인 상을 수상했다. 디자인이 곧 비즈니스 성공의 핵심임을 입증해온 그는 현재 뉴욕에 본부를 둔 더 원 클럽(The One Club) 이사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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