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런던에서 열린 D&AD 페스티벌은 단순한 시상식을 넘어, 전 세계 크리에이티브 전문가들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마주한 질문들에 대해 각자의 언어로 생각을 나누고, 타인의 관점을 경청하며, 함께 고민을 공유하는 자리였습니다.
저 역시 그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지금 내가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되풀이하게 되었고, 여러 세미나와 작품들을 마주하며 머리가 지끈할 정도로 깊은 자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D&AD에서 받은 모든 인상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같은 언어는 없어도, 같은 고민은 있었다.”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질문과 고민의 방향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습니다. “AI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어떤 질문에서 크리에이티브를 시작해야 하는가”, “디자인은 지금 어떤 방향으로 의미를 확장해나가야 하는가”.
모두가 비슷한 속도와 진지함으로 이 질문들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자신의 말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대한 태도와 방식이었습니다
세미나는 단순한 프레젠테이션을 넘어, 마치 짧은 연극처럼 유쾌하고 몰입감 있는 공연이 되기도 했고, 주체할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열정이 자연스럽게 무대를 채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뿐 아니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표현에 대한 시선이 한층 넓어졌고, 고민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누구도 억지로 힘주지 않는 그 분위기 속에서, 어린 학생부터 백발의 크리에이터까지, 누구나 같은 호기심으로 열정적으로 경청하는 모습은 이 분야에서 오래도록 살아남기 위해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답처럼 느껴졌습니다.





‘Change Everything, Change Nothing’
십여 년간 디자인을 해온 저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세미나는 JKR의 Tosh Hall과 Lisa Smith가 진행한 ‘Change Everything, Change Nothing’이었습니다.
리브랜딩을 할 때 기존 자산을 지키며 진화해야 할지, 아니면 과감하게 모든 것을 바꿔야 할지를 두고 펼쳐진 두 연사의 토론은 마치 제 머릿속에서 늘 부딪히던 고민이 무대 위에서 구현된 듯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과거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진정성 있는 진화” vs. “위기 속 빠른 리셋 전략”
이 세션은 리브랜딩이 단순한 디자인 변경이 아닌, 브랜드의 철학과 태도를 다시 묻는 일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특히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제가 캠페인이나 브랜딩을 기획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이미 잘 알려진 브랜드이든, 아직 대중과 연결되지 못한 브랜드이든 이 질문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며, 전 세계의 디자이너들 역시 이 같은 고민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느껴졌습니다.




디자인, 감정의 언어가 되다 — D&AD 2025에서 읽은 흐름
이번 D&AD 페스티벌에서는 그래픽 디자인이 단순한 시각적 표현을 넘어, 감정과 브랜드의 태도를 전달하는 ‘언어’로 확장되는 흐름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기술이나 제품의 기능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적 융합, 사용자의 정서적 연결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브랜드의 철학을 드러내는 작업들이 돋보였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페루의 시멘트 브랜드 Cemento Sol이 후원한 공공 프로젝트 ‘Sightwalks’는 ‘디자인은 어떻게 일상의 권리를 만들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직접적이고 인상적인 해답을 제시한 사례였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지팡이로 보도블록을 두드리는 감각만으로 주변 상점 정보를 인식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 촉각 기반 안내 시스템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게 돕는 저비용·대규모 공공 디자인 솔루션입니다.
전 세계 어디서든 동일한 방식으로 구현 가능한 유니버설 패턴으로 설계되었으며, 복잡한 기술 없이도 감각의 언어로 일상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한 줄의 촉각 신호가 누군가에게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권리’가 되며, 이는 단순한 안내를 넘어 사회적 포용과 존중을 디자인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기술 중심의 디자인이 아닌, 감각과 감정의 언어로 쓰인 진정한 의미의 유니버설 디자인으로서 깊은 울림을 받았습니다.
Sightwalks는 D&AD 2025에서 총 11개 부문에 이름을 올리며, Spatial Design / Public Spaces, Graphic Design / Environmental, Media / Press & Outdoor 부문에서 Yellow Pencil을 수상했으며, 이외에도 Graphite Pencil 2개, Wood Pencil 4개, Shortlist 2개를 수상하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 다른 인상 깊었던 수상작은 그래픽 디자인/모션 디자인 부문에서 Wood Pencil을 수상한 ‘OpenAI – Brand Film’ 작품입니다.
해당 프로젝트는 세미나 ‘Designing Intelligence: Behind the Scenes of OpenAI’s Brand Identity Refresh’에서도 소개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브랜드 리프레시의 기획 의도와 디자인 전략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생생히 들을 수 있었고, 모든 선택에 담긴 고민의 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첨단 AI분야를 선도하는 기업에 어울리는 비주얼 아이덴티티란 무엇인가?’
최신 기술을 상징하면서도 안정감을 주고, 테크 중심이면서도 인간적이며,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친근한 브랜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이 질문에서 출발한 이번 작업은 OpenAI의 철학과 방향성을 정제된 시각 언어로 풀어낸 사례입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단순히 ‘AI를 다루는 브랜드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넘어, ‘브랜드의 철학을 감정의 언어로 풀어내는 디자인’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OpenAI – Brand Film은 기술과 감정, 구조와 감성의 균형을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을지를 보여준 가장 인상 깊은 작업 중 하나였습니다.

이번 D&AD를 참관하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과정’을 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좋은 작업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면에 담긴 수많은 시행착오와 깊은 기획의 흐름을 공유받을 수 있었기에, 각 프로젝트에 깃든 치열함이 더욱 진하게 다가왔습니다.
결국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그 안에 쌓인 고민의 밀도였습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크리에이티브를 대하는 제 시선과 태도 역시 다시 정비할 수 있었으며, 앞으로 제가 만들어갈 디자인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 기대됩니다.

홍수빈 서비스플랜 코리아 디자인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