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조선일보,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광고 관련 사건을 돌아보며(1) - 광고요금 제도, Bad Seed

[신인섭 칼럼] 조선일보,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광고 관련 사건을 돌아보며(1) - 광고요금 제도, Bad Seed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20.03.11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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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살 넘게 사시는 분은 더러 뵈온 적이 있다. 그런데 신문은 처음이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동아일보는 4월 1일 창간이니 겨우 26일 차이다. 1920년이면 3.1독립운동이 있은 다음 해이다. 한일합방 이후 10년 동안 헌병 정치라던 무단정치가 막을 내렸다. 육군대장이던 조선총독은 해고되고 해군대장이 총독이 되어 문화정치를 시작했다. 1919년 9월 1일이었다.

세 신문이 창간되었는데 조선일보, 동아일보 그리고 시사신보이다. 그 중 시사신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신문이 나오면 광고가 따르게 마련이다. 앞으로 다른 신문이 100주년 창간을 맞이하려면 수십년이 걸릴 것이다. 창간 100주년이 된 두 신문의 광고 관련 사건들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 개화기 독립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모두 사라지고 국문 신문은 매일신보(每日申報) 뿐이었다. 이 신문은 조선총독부 조선어 기관지였다. 개화기 신문은 모두 광고요금을 자주, 많이 광고하면 단가가 싸지는 광고량/게재빈도 할인인 서구식 제도를 따랐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된 매일신보는 단일 단가제였다. 그 당시 일본 관례를 따라 실지 거래하는 광고 단가와 공시하는 단가는 달랐다. 쉽게 말하자면 의약품이나 화장품처럼 광고를 자주 많이 하는 업종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싸게 하고 은행이나 관공서처럼 법정광고나 내는 업종은 단가가 비쌌다. 그리고 실거래 단가는 광고주별로 비밀에 붙이는 일본식 광고 거래 관습이 자리를 잡았다. 이 낙후된 광고료 제도는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1899년 6월 2일에는 독립신문이 1면 가운데 거의 3분의 2 지면에 광고의 효능을 비유해 설명하고 아울러 많이, 자주 광고할수록 단가가 싸진다는 것을 알기 쉽게 글로 풀이한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를 도표로 한 것이 '표 1'이다. 이 요금표에 기준해 빈도와 광고량에 따르는 할인 금액의 사례를 표시한 것이 '표 2'인데 할인 금액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광고를 많이 또 자주 낼수록 단가는 싸진다는 상거래의 상식이 신문 광고인 경우에도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표 1] 독립신문 광고료 (1899.6.1)
[표 1] 독립신문 광고료 (1899.6.1)
[표 2] 독립신문 광고료 : 광고량과 광고빈도
[표 2] 독립신문 광고료 : 광고량과 광고빈도

1904년에 영국인 배설 (裵說. Ernest T.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도 역시 빈도와 광고량 할인 단가제를 공개했고 신문에 게재한 것이 그림에 나와 있다.

'대한매일신보' 1904년 12월 2일자 1면, 4단으로 짜인 첫 단 '본사고백'이란 제목 속에 광고료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다만, 광고료의 금액표시는 없다.
'대한매일신보' 1904년 12월 2일자 1면, 4단으로 짜인 첫 단 '본사고백'이란 제목 속에 광고료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다만, 광고료의 금액표시는 없다.
1905년 8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 제4단 '本社廣告'란 제목 다음에 광고료가 표시되어 있다.
1905년 8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 제4단 '本社廣告'란 제목 다음에 광고료가 표시되어 있다.

1918년 7월 4일자 매일신보를 보면 제호 밑에 구독료와 광고 요금표가 나와 있는데 이 요금은 어디까지나 공시한 요금일 뿐 실지는 이와 달랐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뿐 아니라 해방 전 한국에서 발행한 일본어 신문, 나아가서는 일본에서 발행하는 모든 신문도 이런 관례를 따랐다. 일본에서 비롯된 모순된 신문 광고요금 제도가 많이 자주 살수록 단가는 싸진다는 상거래의 합리적인 제도로 바뀌는 데에는 해방 이후 20여년이 걸렸다. 엄청난 연구와 논의가 있었다. “나쁜 씨(Bad Seed)"가 뿌려진 것을 고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우리의 역사와 비슷한 데가 있다고나 할까.

매일신보 1918년 7월 4일 제호와 구독료, 광고료 (左)조선일보 1925년 3월 5일 제호와 구독료, 광고료 (中)동아일보 1923년 11월 21일 제호와 구독료, 광고료. 창간호에 발표한 광고료 (右)
매일신보 1918년 7월 4일 제호와 구독료, 광고료 (左)조선일보 1925년 3월 5일 제호와 구독료, 광고료 (中)동아일보 1923년 11월 21일 제호와 구독료, 광고료. 창간호에 발표한 광고료 (右)

 

 


신인섭 (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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