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고양이목이 아닌 쥐목에 방울 달기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고양이목이 아닌 쥐목에 방울 달기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19.08.2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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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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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목에 방울 달기‘는 모르는 사람을 찾기 힘든 표현이다. 이를 완성된 이야기 형태로 본 건 중학교 2학년 때 영어 교과서에서였다. 교과서에 나온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영어권에서 쓰는 ’bell’을 동사로 활용한 ‘Who will bell the cat’과는 다른 식이었던 것 같다. 한자로는 ‘고양이 묘, 머리 두, 걸 현, 방울 령’을 써서 ‘묘두현령(猫頭懸鈴)’이라고 쓴다.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 실린 그 이야기에서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표현은 ‘Here comes the cat’이었다. 시험 문제로 선생님께서 ‘고양이가 온다’를 영작하라는 문제를 냈는데, 당시 비틀즈(The Beatles) 음악에 빠지기 시작한 시기라, 그들의 히트곡인 ‘Here comes the sun’이 생각나서 교과서 공부한 것과 상관없이 자신 있게 썼었다.

쥐들이 고양이목에 방울을 달자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모두 좋아했는데, 막상 누가 그 방울을 달 것인가로 넘어가면 모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행동으로 넘어갈 때 비굴하거나 무기력한 상태의 표현을 약간 비튼 인물이 있었다. 어느 정치인 예전에 이런 질문을 후배들에게 했다고 한다. “묘두현령(猫頭懸鈴)은 자네들 모두 알 터인데, 그럼 서두현령(鼠頭懸鈴)은 아는가” 고양이 목이 아닌 ‘쥐목에 방울을 단다’라는 표현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그가 후배들에게 해준 풀이는 다음과 같았다.

‘묘두현령’의 명제가 아마 몇 백 년이 넘었을 것인데 해결의 기미가 없자, 어린 쥐가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나섰단다. 모두 놀라면서 얕잡아보고 조롱하였다. 그런데 이 어린 쥐가 자기 목에 방울을 다는 게 아닌가.

“이 녀석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라고 했지 누가 네 목에…, 쯧쯧.” “형님들 두고 보시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미구에 고양이를 마주치자 그 어린 쥐, “고양아, 나하고 맞상대하자”고 도전했다. 놀란 고양이, “너, 술 먹고 해롱해롱 하는 모양인데, 술깨고 보자”고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깨면 또 먹지” 하는 등 끝까지 약을 올리며 대드니 화가 치민 고양이, 어린 쥐를 날름 삼켜버렸다.

그 후부터 고양이 배 속에서 방울 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쥐들은 모두 안전하게 숨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묘두현령’을 해결하려던 목적을 ‘서두현령’으로 해결한 셈이다.

이 정치인은 1950년대에는 자유당에 맞섰던 민주당, 이후는 혁신계 사회당 계열의 대표적 인사였고, 1970년대에도 야당 인사로 명망이 높았다. 그런데 1980년대에 군부 독재의 연장선상에서 태어난 당시의 집권 여당 인사로 변신하여, 실망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묘두현령’의 한 글자만 ‘서두현령’으로 바꾸며, 그는 나름 자신의 변신을 비유적으로 합리화하는 시도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갔다고나 할까.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표현으로는 멋진 반전이었다.

췌담(贅談) 하나. 서두현령을 붓글씨로도 많이 쓰셨다고 하던데, 그런 합리화 노력까지 진부해지고, 대통령이 바뀐 후에 이 정치인이 내 구두를 바꿔 신고 간 적이 있었다. 고양이를 쥐로 바꾸는 것과 같은 의도가 없는 순전한 그 정치인의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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