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문샷(Moonshot) 프로젝트가 이끈 반전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문샷(Moonshot) 프로젝트가 이끈 반전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19.09.16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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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John F. Kennedy speaking at Rice University on September 12, 1962 (출처 Wikipedia)
President John F. Kennedy speaking at Rice University on September 12, 1962 (출처 Wikipedia)

추석 직후라 달 얘기를 하려한다. 지금으로부터 57년 전인 1962년 9월 12일(미국 기준) 미국의 남부 지역 텍사스 주의 휴스턴 시는 한여름보다도 더 무더웠다. 그런데도 라이스대학교의 풋볼스타디움에는 3만 5천여 명에 이르는 인파가 운집했다.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맨 연단 위의 귀빈들까지 연신 팸플릿으로 부채질을 해대는데, 검은 색 양복과 가는 넥타이가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연사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 같은 모습으로 또박또박한 뉴잉글랜드 발음으로 사자후를 토하며 청중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우리는 이번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 문장, 이른바 ‘문샷(Moonshot) 프로젝트’로 존 F. 케네디의 라이스대학 연설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비전(Vision)이나 미션(Mission)을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한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한다. 실제로 1970년대로 넘어가기 직전인 1969년 7월에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면서, 케네디의 공약은 극적으로 실현되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감스럽게도 연설의 주인공인 케네디 대통령은 라이스대학 연단에 선 1년 2개월 후인 1963년 11월 같은 텍사스 주의 댈라스에서 피격 사망하며 영광의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그런데 워낙 연설이 극적이고, 이어진 케네디 암살과 같은 엄청난 사건의 여파 때문인지, 연설 전의 사정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케네디 대통령이 최초로 문샷 프로젝트를 공개적으로 발표한 건 그보다 1년 4개월 앞선 1961년 5월 25일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였다. 대통령 취임 4개월밖에 되지 않은 당시에 케네디 대통령은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바로 한 달 전인 4월 12일에 냉전 시대 최대의 라이벌인 소련은 세계 최초로 인간을 우주에 보내어 지구 궤도를 도는 데 성공했다. 바로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란 영광을 안은 유리 가가린이었다. 1957년 10월에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에 이어 우주전쟁에서 미국이 두 번째로 당한 결정타였다. 우주가 아닌 땅에서도 케네디, 곧 미국의 굴욕은 이어졌다. 4월 17일 새벽에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겠다고 피그스만에 상륙시킨 부대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한 것이다. 그래서 케네디는 상하원 합동 연설에 직접 나서지 않고 문안만 제출하든지 대독을 시키려고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바꿔서 직접 나섰다. 그리고 46분에 걸친 연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역사에 남는 언급을 한다.

I believe that this nation should commit itself to achieving the goal, before this decade is out, of landing a man on the moon and returning him safely to the Earth. (우리는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무사히 지구로 귀환시키는 과업을 달성해야만 합니다.)

사실 이 연설의 최초 30분 동안에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취해야 할 21개 제안을 내놓는 등, 연설의 주요 소재는 우주계획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천명한 문샷 프로젝트가 신문 1면을 장식했다. 의회에서 NASA 예산을 증액하라는 소리가 나왔다. 6월에는 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우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존슨의 지역구였던 텍사스 휴스턴에 유인 우주선 센터(Manned Spacecraft Center-후에 Johnson Space Center로 바뀜)가 설립되었다. 휴스턴 라이스대학에서의 연설은 센터의 장소를 휴스턴으로 정한 후에, 본격적인 공사 시작을 기념하여 행해진 것이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은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미국의 문샷 프로젝트에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수장을 맡은 존슨이 대통령이 되면서 더욱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 1961년 미국 정부 예산의 1%가 채 되지 않았던 NASA의 예산은 1966년에 4.4%에 이르게 되고, 1969년 마침내 닐 암스트롱이 작은 한 걸음을 달 표면에 딛게 된다.

‘인간을 달에 보낸다’는 문샷은 높은 목표지만 명료하게 커뮤니케이션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커뮤니케이션에는 반전이 따라온다. 나락으로 떨어지던 케네디 대통령을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우주대전에서 소련을 제치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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