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여백을 둔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여백을 둔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1.03.08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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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화가는 무엇이 더 필요한가, 뭘 그려야 더 좋은 그림이 될까 하는 이런 차원을 넘어서서 오히려 이 화폭에서 뭐가 없어져야 좋은 그림이 되는지를 생각하는 이런 여유와 멋을 압니다."

한국 미술 평론가인 고 오주석의 말이다. 이런 ‘여유와 멋’이 동양화 전반에서는 여백을 통하여 표현한다. 동양화에서의 '여백의 미'를 보여 주는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나는 리커란(李可染)의 <목우도(牧牛圖)>를 주로 거론한다. 여기서 작가는 여백의 미를 떠나, 여백으로 실체를 만들어 내는 마술을 부리고 있다. 물 찬 개울을 소들이 콧구멍까지 물에 잠겨 어푸어푸하면서 건너고 있는 정경을, 물을 굳이 그리지 않고도 너무나도 실감 나게 표현했다. 엷게 칠한 소잔등이 물 먹은 털과 같은 효과를 주고, 어느새 또 소잔등에 올라탄 인물의 시선을 따라 매화 가지로 눈이 옮겨진다. 실제로 그 인물의 눈은 보이지 않고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뒤에 따라 오고 있는 소가 걱정되어 보는 것인지, 정말 개울가의 매화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언덕에 누가 소리쳐 부르고 있는 것인지, 맘대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내가 생각하는 동양화의 미덕, 곧 ‘무위지위(無爲之爲)’가 기가 막히게 잘 구현되었다.

광고에서도 사실 이런 꼭 ‘말하지 않아도’, 소비자가 알아서 이해하고 공감하는 그런 광고들이 있다. 강의할 때 자주 받는 질문 중의 대표적인 것들이 ‘어떤 브랜드가 좋은 브랜드냐?’, ‘어떤 광고가 좋은 광고이냐?’ 하는 브랜드와 광고의 점수를 매기는 문제들이다. 질문도 두리뭉실하고, 시간도 많지 않아 역시 두리뭉실하게 대답하곤 했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면, 말이 적은, 카피가 간결한 광고가 보통 좋은 광고이고, 그런 광고를 하는 브랜드들이 좋은 브랜드입니다.” 브랜드가 확실히 서 있으면, 자신감이 뒷받침되고 긴말 할 필요가 없다. 뭔가 빠진 것이 없나 조바심을 내면서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고, 정말 허접스러워진다. 그리고 없을수록 자꾸 알아줘 달라고 꾸미다 보면 허튼소리 하게 되고, 그 때문에 또 약점이 잡히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물리학 관련 서적으로는 최고의 판매 부수를 기록한 『시간의 역사』란 책의 서문에서 저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는 동료 학자가 물리학 공식이 들어가면 공식 하나마다 독자들이 반으로 줄어들 것이라 해서, 공식을 쓰지 않으려 애를 썼단다. 그런데 결국 그 유명한 ‘E=mc2'만은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호두껍질 속의 우주』에서는 ’복잡한 수학 공식 없이도 폭넓은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확실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공식을 알아야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공식을 공식이 아니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물을 그리지 않아도 감상자들이 알아서 물 냄새까지 맡게 만드는 그런 그림이 좋은 그림이다. 광고도 마찬가지이다. 지난한 과제이기는 하다.

리커란의 <목우도>를 처음 만난 전시회에서 감동을 주체 못 해 족자를 산 것에 덧붙여, 화가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어서 리커란의 제자가 쓴 그의 평전과 같은 형식의 『20세기 중국 회화의 거장 리커란 李可染』 (완칭리 지음·문정희 옮김, 시공사, 2003)이란 책을 바로 그 전시장을 나오며 사서 읽었다. 리커란이 산수화에서 나타내고자 한 것은 '의경(意景)'이었다. 의경이란 문자 그대로 '뜻이나 정(情)을 나타내는 의(意)'와 '실제로 보이는 경치(景)'이 함께 어우러진 것을 말한다. 그러한 정과 경의 융합은 '객관적인 사물의 정수(精髓)를 집결'한 후,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빚고 녹여 만들어 고도의 예술적인 가공을 거쳐'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그는 "중국화는 본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앎(知)과 생각(想)을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의경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 혹은 단계로 그는 세 가지를 들었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뽑아내어 선택하는 '선재(選材)', 나쁜 것은 생략해 버리고 좋은 것만 남기는 '전재(剪裁)', 전력을 다하여 주제를 강조하는 '과장(誇張)'이 바로 그들이다. ’전재‘가 바로 부러 만드는 결핍이요, 그를 통하여 꾀하는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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