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2001년 9월 11일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2001년 9월 11일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3.09.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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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미국 시각으로 2001년 9월 11일 아침, 한국 시각으로는 같은 날 저녁 9시 무렵, 나는 서울 청담동의 어느 와인바에 있었다. 당시 미국 주재원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삼성전자의 그다음 해인 2002년 커뮤니케이션 전략 협의를 위하여 함께 일하던 미국 광고회사의 친구들과 함께 그 며칠 전 서울에 들어와 있던 차였다. 그 회의를 포함한 대략의 일정을 마치고, 다음 날인 9월 12일 마지막 정리 회의만을 남기고 있었다. 미국 친구들은 정리 회의를 하고 9월 13일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예정이었고, 나는 하루를 더 머물러 9월 14일 뉴욕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대충 일정을 마친 시점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일정도 없고 해서 오래간만에 오래전에 함께 일했었던 친구들을 만나서 식사하고, 본격적으로 세게 마시러 가자는 친구들을 달래고 애걸하고 해서 겨우 와인바로 유도를 해서 자리를 막 잡고 앉았던 참에 전화가 왔다. 미국에 남아 있던 동료에게서 온 전화였다. 함께 서울에 왔던 동료의 소재를 묻고, 서울 일의 성과와 추이 등 업무 관련한 얘기를 나눈 후, 이 친구가 끊으려 하던 차에 덧붙였다. "근데 여기서는 구경 잘하고 있어요." 어떤 구경이냐고 의아해서 물어보니, 그 친구 왈, "어느 얼뜨기 놈이 비행기를 몰고 가다가 월드트레이드센터에 꼬라박아서....연기가 폴폴 나고...." 언젠가 TV 해외 뉴스 한 토막으로 보았던, 세스나 경비행기와 라이트(Wright) 형제의 비행기 중간쯤 되는 거인의 장난감 같은 글라이더가 민가 지붕에 거꾸로 박힌 영상이 떠올랐다. 너털웃음을 짓던 수화기 건너편 친구에게서 "어, 어...."하는 소리가 계속 나오면서 그 친구가 혼잣말처럼 소리쳤다. "또 한 대가...."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스파이 전쟁의 미국 쪽 요원으로 평생을 보낸 한 인사의 회고록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계획하지 않은 우리에게 타격을 주는 일이 갑자기 일어나면 그것은 우연이다. 그런데 같은 일이 또 한 번 일어난다면 그것은 적(敵)이 일으킨 것이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세계무역센터에 두 번째 비행기가 충돌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뭔가 의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 친구들과 와인을 마시면서 옛날 얘기할 계제가 아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두 친구에게 비행기 두 대가 연달아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는데, 뭔가 큰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미국과 계속 연락을 취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일방적으로 쏟아붓고는 바로 그 와인바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당시 부모님 댁에 머물고 있었는데, 와인바에서 택시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게 가깝게 있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의 10분 동안에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자 "그래, 계속 자막으로 뜨는데 아주 수상하다. 빨리 와라"라고 말씀을 하셨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그때까지 자막으로만 소식을 알리던 한국의 TV 뉴스가 바로 미국 방송을 받아서 긴급 프로그램을 내보내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가족들에게 전화를 계속 시도했지만 이미 통화량이 폭주하여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사건의 현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서 별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아이들의 심리적 충격이 좀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만난, 함께 온 미국 광고회사 친구들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대부분 맨해튼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었으니 이해가 될 만도 하다. 비행기는 기약 없이 취소되고, 가족들과 연락은 전혀 되지 않으니 당연했다. 원래의 일정에서 이틀 정도 연기된 채 모두 무사히 집으로 갈 수는 있었지만, 서울에서 겪었던 9·11과 그 쇼크는 꽤 오랫동안 우리끼리 얘기하는 데 주된 소재였다.

9·11 5주년을 맞이하여, 희생자를 위한 기금 모금을 더욱 활성화할 목적으로 '911 사건이 났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Where were you when it happened)?'란 질문을 던지는 광고 캠페인이 나왔었다. 일반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은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때 나는 샤워를 하고 있었지요....나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 중이었어요....아내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지요....' 등등. 광고에 나오는 것과 함께 수많은 사람의 자발적인 이야기들이 전달되고 있다고 한다. 거의 모두가 아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단다.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는 가끔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였던 역사적인 사건들이 나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역사 자체가 살아서 다가오는 것이다.

9·11 5주년을 맞이해서 나온 기금모금을 위한 광고는 그런 역사와 개인 간의 만남을 그리며, 역사적 사건을 자신과 결부시켜 반추하면서, 자연스럽게 기금모금을 통한 관련 활동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역사는 교과서나 책 속에만 있지 않다. 완전히 지나가서 단절된 채로만 존재하는 과거는 없다. 부모님 연배 분들과 4월에 얘기를 나누게 되면 4·19혁명 때 무엇을 했는지 듣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 20대 친구들과는 4월이 되면 세월호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다음 달 10월 말에 우리는 아마 이태원 참사를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건들이 환기되고, 개인과 연계되어 되새겨지며 의미의 반전이 이루어져, 역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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