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왕위에서 물러나겠노라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왕위에서 물러나겠노라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3.09.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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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not.king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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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백의종군’이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이 제1연상으로 떠오른다. 장군으로 큰 공을 세웠지만, 원균에게 모함을 받고, 모진 심문을 받은 후에 계급도 없이 군대에 합류하여 종사하는 모습을 몇 차례의 영화에서도 보고 위인전에서 읽었던 까닭이다. 자존심과 원한이나 섭섭함을 뒤로 하고 자발적으로 군사에 나선 환란에 빠진 국가를 구하겠다는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에 감명받았다. 그런데 백의종군은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내리던 공식 형벌 중의 하나라고 한다. 곧 계급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조국을 위해 나서겠다는 스스로 결정보다는, ‘백의종군에 처한다’라는 식의 재판 결과에 따른 심판 측면이 강했다는 것이다.

낱말들이 시대에 따라 쓰임새와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최근에 백의종군이 쓰이는 사례를 보면 자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좋지 않은 성적을 올린 프로 선수들이 대폭 삭감된 연봉을 받으면서도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고 할 때, 곧잘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와 같은 표현을 쓴다. 물의를 빚은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다시 무대에 서거나 선거에 나서면서 같은 식의 말을 하는 것도 꽤 봤다.

스스로 물러날 때 보통은 ‘자퇴(自退)’라는 낱말을 쓴다. 학교에서 주로 접했던 단어인데, 정치권에서 장관 등의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책임을 지고 스스로 자리에서 나가라고 할 때 쓰기도 한다. 용기 있게 물러나라며 ‘용퇴’, 자리에서 나가라며 ‘퇴위’라는 말도 나온다. 그 자리가 왕위라면 ‘양보한다’, ‘사양한다’라고 할 때의 ‘양(讓)’을 자리의 지위를 나타내는 ‘위(位)’와 함께 써서 ‘양위(讓位)’라는 표현을 쓴다. 조선 시대 3대 왕인 태종이 셋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살아 있는 상태에서 양위했다. 불안하게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의 기반을 확실하게 하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는 몇 차례 양위하겠노라고 발표했지만, 끝내 죽을 때까지 자기 자리를 지켰다. 자기 잘못이나 곤경을 타개하는 정치적 제스처로 활용한 것이다.

햄버거 패스트푸드 업계에서도 왕위를 스스로 부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왕이 아니다’라는 ‘I AM NOT KING’이란 상호를 알리는 표지판과 함께 점포 공사가 진행되고, @iam.not.king이란 인스타그램도 열었다. 인스타그램을 통한 추첨으로 같은 이름으로 선보이는 메뉴를 무료로 제공하는 행사도 열었다. ‘아임낫킹’ 버거를 맛본 이들의 반응은 칭찬 일색이었다. 그러고는 바로 점포 공사하고 문을 연 것부터 왕이 아니라고 한 메뉴까지 버거킹에서 한 행사이고, 블라인드 테스트의 일환이었다고 밝힌다. 고객들을 살짝 속이거나 골탕 먹이는 식의 버거킹이 지난 10여년 간 잊을 만하면 진행하던 마케팅 프로그램과 같은 선상에서 일관성을 찾아볼 수 있는 신규 이벤트이다.

출처 성해은 인스타그램 계정
출처 성해은 인스타그램 계정

실제 2010년 이래 지난 10년간 광고 마케팅 업계에서 가장 자주 화제가 된 프로그램을 많이 한 브랜드를 꼽으라면 아마도 버거킹이 꼽힐 것이다. 와퍼를 주문하는 손님에게 메뉴에서 없애버렸다고 했을 때의 반응을 몰래카메라 형식으로 찍어서 와퍼의 무게와 존재감을 과시했다든지, 버거킹 앱을 다운받고 맥도날드 매장에 들렀다가 오면 와퍼를 1센트에 주는 식으로 경쟁사를 도발하는 캠페인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일련의 행사는 버거킹의 전 세계 매장에서 똑같이 진행된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느 한 국가의 버거킹에서 손님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디어를 내고 로컬 차원에서 실행하고, 그게 화제가 되어 알려지면서 다른 국가들에서도 시행하는 식이었다. 그런 아이디어를 잘 내는 대표 국가들로는 브라질과 태국이 꼽힌다. 둘 다 경제력이나 국력과 평판 대비 광고 강국으로 정평이 있는 국가들이다.

한국 버거킹에서 선도하여 내놓은 마케팅 프로그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이번 양위, 혹은 자진 퇴위의 ‘아이앰낫킹’ 가짜 점포 오픈과 메뉴 제공, 블라인드 테스트는 오로지 한국에서만 행해진 것 같다. 그저 외국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받는 게 아니라, 한국발 실험을 발의하고 실행했다는 데서 효과를 떠나 주목할 만하다. ‘즐거운 깜짝 재미(pleasant surprising fun)’로 펼쳐진 이 행사의 후속이 기대된다. 태종이 양위 이후 세종 치세와 같은 융성으로 이어질지, 그저 제스처로만 끝난 선조의 놀음처럼 정묘와 병자의 호란으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지경으로 갈지, 버거킹의 운명에도 이번 ‘양위 사태(?)’의 여파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박재항 매드타임스 대기자, G_BAT대표, 인하대 초빙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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