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상징으로 생각을 깨우는 문, 데카트론

새로운 상징으로 생각을 깨우는 문, 데카트론

  • 장영주 대학생 기자
  • 승인 2023.05.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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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장영주 대학생 기자] 우리는 상징으로 살아간다. 나와 남, 무언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그들의 상징을 떠올리게 된다. 책, 커피 하면 떠오르는 아이콘이 있고 여성과 남성을 생각할 때 가장 널리 알려진 픽토그램이 생각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다른 누군가를 떠올릴 때, 단정함이라던가 쾌활함과 같은 단어가 불현 듯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는 모두 우리의 상징이다.

우리는 가장 처음 떠오르는 것을 오래 기억한다. 또한 그것이 가장 주된 이미지나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단 하나의 상징은 우리에게 있어 고유 명사로 자리 잡기도 한다. 특정 대상에 대한 상징물이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혹은 ‘나’를 이루는 요소는 다양하고 방대하다. 그렇기에 남이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상징이 다를 수도 있다. ‘강아지’라는 단어를 보고 떠올리는 이미지가 각자 다른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상징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우린 유일한 상징을 가지고 간다. 한 번 널리 알려진 상징들은 그 의미가 예전과 달라지거나 사실과 다른 정보라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여성이 모두 치마만을 입는 것이 아닌데 여성 화장실의 픽토그램은 치마를 입은 사람인 것처럼. 파란색이 남성의 고유의 색은 아니며 모두 선호하는 색이 다름에도 남성 화장실의 픽토그램이 파란색인 것처럼. 세계적으로 공유된 상징은 바뀌기 힘들며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상징을 바꾸고자 하는 기업이 있다.

스포츠 브랜드 데카트론은 이 상징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장애’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상징은 휠체어에 탄 사람의 픽토그램이다. 모든 공공장소와 기관, 주차구역이나 장애인 전용 시설에는 이 한 가지의 픽토그램이 사용된다. 데카트론은 장애인을 그저 휠체어에 앉아있는 이들로 보이는 것을 타파하고자 했다.

캐나다 데카트론 공식 유튜브 채널
캐나다 데카트론 공식 유튜브 채널

데카트론이 본 ‘장애’는 특별하거나 차별화된 것이 아니다. 다르지 않다. 휠체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있지 않는다. 역동적이며 원하는 스포츠를 즐긴다. 상식적인 내용이지만 사람들은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간과한다. 패럴림픽만 봐도 역동적인 선수들을 볼 수 있음에도, 일상에서 휠체어를 활용해 이동하는 이들은 많음에도 ‘장애’에 대한 이미지는 휠체어에 그저 앉아있는 이들로 생각될 때가 많다.

캐나다 데카트론 공식 유튜브 채널
캐나다 데카트론 공식 유튜브 채널

이런 안일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장애 픽토그램을 우리는 오랜 시간 사용해왔다. 데카트론은 그 사실을 지적한다. 상징적인 색상인 파란색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그들은 다양한 스포츠를 하는 심볼을 만들어 장애인 주차장의 표식을 바꿨다. 이 캠페인은 단기적인 것이 아니며 공공장소 심볼 변경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자신들이 만든 다양한 스포츠 기호들을 활용할 수 있게 공유한다.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하며 그 행위로 인해 세계의 많은 장애인 상징이 서서히 바뀌기를 희망하고 있다. 또한 SNS의 해시태그 #AbilitySigns로 기호의 활용을 공유하게 하며 확산시키고자 한다.

미국 데카트론 공식 홈페이지 선언문
미국 데카트론 공식 홈페이지 선언문

데카트론 홈페이지에는 “데카트론 접근성 선언문”이 존재한다. 어디서나, 모든 이들에게 스포츠를 제공할 수 있게 목표를 잡았다고 이야기하는 그들은, “장애가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접근 가능하도록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국내에도 이러한 노력들이 존재한다. “모두의 드리블”과 같은 캠페인은 공을 드리블하면서 갈 수 있는 공간은 휠체어로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드리블을 통해 경기장에 오는 길을 추적하여 휠체어가 어떠한 장애물 없이 경기장에 올 수 있는 지도를 제작하여 제공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데카트론의 생각은 당연하다. 이 세상에는 장애가 없는 사람만 살아가지 않는다. 말 그대로 모두가 다양하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이런 현실에서 휠체어를 끄는 이가 타인의 도움 없이 이동하기 힘든 공간이 있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공간일까? 우리는 일부의 이들에게만 허용된 공간을 너무 많이 생성해오고 있다. 투표를 위한 공간조차 스스로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지하철 역이 존재하여 이동권 투쟁을 하는 상황에서, ‘모두’를 위한 것이 무엇인지 적확히 인지하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한 ‘모두’에 배제된 이들은 없었는가? 그 생각과 인지를 통해 앞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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