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ROSETTA STONE (로제타의 돌)

[신인섭 칼럼] ROSETTA STONE (로제타의 돌)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18.11.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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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박물관에 전시된 로제타 돌 (출처 The British Museum Blog)
영국박물관에 전시된 로제타 돌 (출처 The British Museum Blog)

대학에서 광고 공부를 할 때, 의례 나오는 "서양 광고의 원조"인 로제타의 돌 이야기이다.

지금은 런던에 있는 British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 삼각주에 있던 돌 비석이다. 그 내용은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으로부터 약 2200년 전 이집트 프톨레미 V세(BC 204-181) 파라오에 대한 칭송의 글이다. 당시 이집트에 있던 수많은 사원에 건립했으므로 틀림없이 광고이기는 하나 내용을 현대적 의미로 하자면 PR이요 홍보이다. BC 196년 13세 때 즉위 1주년에 세운 칭송비인 셈이다.

로제타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돌을 발견한 곳의 서양 이름을 따온 것으로 원래는 러슈디이다. 18세기 말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와 영군이 지배권을 다투다가 프랑스군의 패배로 이집트 각처에서 가져다 모아 두었던 모든 노획물이 영국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가는 곳마다 수많은 학자를 대동했다. 그런 전통은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침입했다 퇴각한 프랑스군이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간 데에서도 나타난다.

지금의 로제타 돌과 원래 모습 상상도
지금의 로제타 돌과 원래 모습 상상도 (출처 The British Museum Blog)

로제타의 돌은 고대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를 아는 창구가 되었다는 이유로 매우 중요하고 또한 유명하다. 돌의 크기는 아래 위가 112.3cm, 가로 75.7cm, 두께 28.4cm이고 화강암 비슷한 돌에 새긴 글이다. 그런데 그림에 보듯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상하좌우가 깨어진 것으로 언어가 세 가지로 되어 있다. 맨 위가 상형분자이고 가운데가 당시 민간에서 사용하던 민용문자, 아래가 그리스어이다. 그리스어가 있는 이유는 알렉산더왕이 이집트를 점령했었고 그 휘하 장군들이 이집트를 통치하던 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형문자를 풀이하는 데에는 그리스어가 큰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민용문자는 4세기까지 사용되었으나 그 뒤 사용하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여하튼 상형문자 풀이를 한 사람은 프랑스 학자 샹폴레온(1790-1832)으로 1822년의 일이었다.

세 가지 언어. 위로부터 상형문자 14줄, 민용문자 32줄, 그리스어 53줄 (출처 The British Museum Blog)
세 가지 언어. 위로부터 상형문자 14줄, 민용문자 32줄, 그리스어 53줄 (출처 The British Museum Blog)

20세기에는 여러 차례 로제타의 돌을 돌려달라는 이집트의 요구가 있었으나 거절당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프랑스가 KTX 사업을 하면서도 종내 강화도에서 탈취해 간 문화재는 어쩔 수 없던 것이나 비슷한 일이 로제타의 돌에도 있었다. 아이러니는 상형문자를 풀이해서 이집트 역사를 읽을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프랑스인이었다는 사실이다.

하기야 시대는 다르지만 "동경 밝은 달 아래..."로 시작되는 신라 향가를 먼저 풀이한 사람이 일본 학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이었고, 이 분의 제자가 해방 후 서울대학 초대 국문학과장이던 이숭녕 박사였다. 이 글을 쓰는 나는 해방 전 평양사범학교에서 이승녕 선생한테서 처용가(處容歌) 이야기를 들었고, 또한 영어 가르침을 받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해방 후 곧 조선인 학생 모두를 모아 놓고 우리말로 명연설을 하고 서울로 올라오신 이숭녕 선생의 연설은 다 잊었지만 그 감격은 지금도 떠오른다. 그리고 모진 식민지 시대에 한국어를 연구하던 이숭녕 선생은 잊혀지지 않는다.

신인섭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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