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섭 칼럼] 고난 속에 이어온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신인섭 칼럼] 고난 속에 이어온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 신인섭 대기자
  • 승인 2018.12.20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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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AS AND

NEW YEAR

GREETINGS

1932-1933.

GOOD HEALTH

保健

海州救世療養院

1932년 - 지금으로부터 86년 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온 크리스마스 씰에 실린 글이다. 한문은 “보건. 해주 구세 요양원”이다. 해주는 지금은 이북 황해남도, 해방 전 황해도 도청 소재지이다. 이 곳에 한국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원이 생겼다. 이 요양원을 세운 사람은 캐나다의 의료 선교사 셔우드 홀 박사 (Dr. Sherwood Hall). 1893년, 평양에서 의료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2년 그의 나이 30세에 해주 요양원으로 부임했다. 결핵 환자 치료 사업을 위해 창안한 것이 크리스마스 씰 판매였다.

발행되지 못한 한국 최초의 씰 - 거북선 그림
발행되지 못한 한국 최초의 씰 - 거북선 그림

첫해 씰의 디자인은 거북선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자랑으로 삼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씰을 널리 알리려는 뜻이었다. 그런데 허가를 받으려 했더니, 조선 총독부는 이 디자인을 허가하지 않았다. 조선인 반일 민족 감정을 자극한다는 이유였다. (지금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금지된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 디자인이 남아 있다.) 고쳐서 남대문 모양을 본 따서 만든 씰이 통과되었다.

1940년까지 아홉 번을 발행했는데 모두 한국 문화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특이한 것은 1937년의 씰인데 당시 저명한 청년 작가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의 그림 “팽이 치는 소년”이었다. 김기창은 이듬해 1938년에도 작품을 만들었는데 제목은 “제기 차기”였다.

마지막 씰은 1940년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서구 국가와의 관계가 차차 악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이미 이 때는 홀이 일본 헌병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있었다. 씰에 그려진 어린이와 그 배경이 된 금강산의 그림이 문제가 됐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20m 이상 높이의 산은 사진이나 그림에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로 만든 것이 산 그림 대신 대문을 그렸는데, 이 씰은 모두 압수되어 발행하지 못했고 압수를 면한 몇 장만이 남아 있다. 홀은 “간첩 행위”라는 누명을 쓰고 한국에서 쫓겨나서 인도로 가서 의료 선교를 계속했다.

판매되지 못하고 견본만이 몇 개 남아 있는 1940년 씰
판매되지 못하고 견본만이 몇 개 남아 있는 1940년 씰

전해 오는 흥미 진진한 이야기는 해주 요양병원과 크리스마스 씰 이야기가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전해져서 주고 받은 카드가 있었다는 말이다. 홀 박사가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에는 결핵에 걸린 한국 소녀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 소녀에게 완쾌되기를 바란다는 카드를 보냈다. 이 소녀는 그 뒤 완쾌되어 퇴원했다는 소문이 퍼져 씰 운동이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유한양행은 크리스마스 씰 운동을 위해 당시 하나 뿐이던 영자 일간지 "SeouL Press"에 자비로 광고를 게재했다. 한 편의 시와 같은 SEASONS' GREETINGS이 남아 있다. 첫 단락만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성탄 인사

내가 크리스마스 채권을 샀기 때문에

한 명의 어린아이라도

더욱 든든해지고 즐거운 일이 생기게 된다면

내가 한 일은 노래가 될 것이다...(1936/11/22 Seoul Press)

아직 한국에는 아직 공익광고라는 개념은 커녕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도 없고 없던 시절이었으니 이 광고는 한국 광고사에 길이 남아야 할 최초의 영문 공익광고가 될 것이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역사에는 이렇듯 일제 하의 쓰라린 고난의 자욱이 얽혀 있다.

홀 박사는 1984년 모란 훈장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서울 절두산 옆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 운동에 관해서는 신동규 교수(동아대학)의 훌륭한 논문 “일제 침략기 선교사 셔우드 홀 (Sherwood Hall)과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을 통해 본 한일관계에 대한 고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글과 그림은 이 논문과 그 밖의 자료에서 발췌한 것이다.

신인섭 (중앙대학교 신방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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