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중국과 한국의 ‘장군의 밤’

[박재항의 反轉 커뮤니케이션] 중국과 한국의 ‘장군의 밤’

  • 박재항 대기자
  • 승인 2021.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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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타임스 박재항 대기자] 1989년 5월 타이완에서 <將軍之夜(장군지야)>라는 제목의 책이 발간되었다. ‘장군의 밤’이라니 역덕(역사 덕후)나 밀덕(밀리터리 덕후)이 아니더라도 뭔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거기에 ‘韓國雙十二事件(한국쌍십이사건)’이란 부제가 붙었다. 책 표지에 ‘한국 현대사 최고 격동(韓國現代史最激動)’에 ‘전두환 정변(全斗煥政變)’이라고 큼지막하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 다수가 의도하지 않은 기대를 하고 그 책을 집어 들었다고 한다. 중국 현대사의 분기점이 된 사건 하나가 연대는 다르지만 같은 날짜인 12월 12일에 일어났다.

1936년 12월 12일 한나라와 당나라의 수도로 예전에는 장안(長安)이라고 불렸던 유서 깊은 도시인 서안(西安)의 새벽을 총성이 깨웠다. 서안 시내에서 16km 떨어진 당나라 때 양귀비가 목욕했던 곳이란 전설이 있는 화청지(華淸池)의 한 건물에서는 잠옷 차림의 중년 사내가 허겁지겁 몇몇 군인들과 함께 맨발로 언덕배기를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을 쫓는 이들의 총탄으로 중년 사내를 호위하며 달리던 군인들이 하나씩 쓰러지고, 결국 얕은 굴 에 숨었다가 발각된 잠옷 차림의 사내가 틀니가 빠져서 새나가는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나는 장(蔣) 위원장이다. 나를 포로로 삼으려거든 나를 사살하라.”

추격하던 군인들이 포로가 아니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인이라며 최대한 정중하게 모시겠다고 했다. 틀니가 없어서 발음이 새던 그 중년 사내는 당시 중국 국민당의 영수로 공식적 중국의 국가원수 총통을 맡고 있던 장제스(蔣介石)였다. 그를 쫓았던 군인들은 중국의 제2인자로 인정받고 있던, 이전 만주를 포함한 중국 동북 3성을 호령하던 장쉐량(張学良)의 부하들이었다. 의형제와 같은 모습을 보인 두 사람이었지만 전개된 상황을 보면 동생이 형을 체포, 구금한 전형적인 상명하복의 쿠데타였다. 그 자체로 반전인데 진행은 일반적인 예상을 벗어난다.

장쉐량의 부하들은 실질적으로 그들의 포로가 된 장제스를 죽여야 한다는데, 장쉐량은 공산당을 아우르는 진정한 중국의 지도자는 장제스밖에 없다며 추켜올린다. 장제스가 말살시키려 한 공산당 측에서 온 인사들이 들이닥쳐 장제스를 죽이면 안 된다며 지도자로 옹립하자고 한다. 장제스의 충복을 자처했던 이들은 서안을 폭격하고자 한다. 장제스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지만,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직접 서안으로 날아갔다. 이전에 사랑하는 사이였고, 계속 서로 흠모한다는 장쉐량과 쑹메이링의 관계에 힘입어 협상이 진행되었다. 결국 장제스는 공산당과 함께 일본에 대항한다는 국공합작에 동의하고 풀려났다. 명실공히 반일투쟁을 우선으로 삼는 중국 전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장제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쉐량은 반성과 충성의 표시로 스스로 남경(南京)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장제스 일행과 함께 올랐다. 이후 장제스가 죽고 나서 그 뒤를 이은 아들이 총통으로 지배하는 기간까지 50년 넘는 감금 생활이 이어졌다.

서안사변 후 고위층
장쉐량과 장제스

중국 현대사를 넘어서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는 서안사변의 가장 기막힌 반전은 반란과 협상과 타협에 이어 국공합작까지의 모든 전개가 아무런 문서 없이 구두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을 보고 가장 의심이 많은 민족이라고 얘기한다. 그런 이들에게 말로만 한 약속이 성문 계약서보다 강한 압박으로 작용한다. 서로 뒤통수를 치고, 혈육 사이라도 피바다를 연출하는 사건으로 점철되는 중국 역사에, 이념까지 끼어든 현대사에 서로 간의 믿음이 발붙일 곳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중국’이란 개념이 현재의 중국. 특히 타이완의 비(非)국민당 세력에서는 매우 약해졌다. ‘90년대까지 중국 양안의 집권층에서는 공유하던 이상이었다. 현대 중국이 지향하던 브랜드였다고도 할 수 있다.

1979년 한국의 12월 12일은 달랐다. 이념보다는 바로 눈앞의 목표가 있었고, 먼저 총을 발사한 이들은 그를 이루었다. ‘장군의 밤’을 주도한 이들은 이후 10년 넘게 한국을 지배했다. 피해자라는 이들이 1990년대에 정치권에 나서고 했으니, 이번 세기에 접어들어서는 그’ 장군의 밤’은 화제가 되지 않는다. 그에 비하여 중국에서 85년 전에 벌어졌던 정변은 지금도 중화권에서는 끊임없이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있다. 반전이 일구는 창조의 생명력이라고 할까.

 


박재항 한림대학교 겸임교수, 대학내일 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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